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들 사이로 눅눅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지난밤, 끊이지 않던 녀석들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귓가에 아직도 맴돌았다. 벌써 몇 년째일까. 정확히 세는 것을 멈춘 지 오래다. 이젠 그저, 또 하루가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지우는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폐허가 된 도시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 밟히는 유리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하나를 좇았다. 생존. 썩은 비린내와 먼지가 뒤섞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는 무너진 백화점 잔해 속으로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어쩌면 운이 좋다면 통조림 하나, 아니면 깨끗한 물 한 병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며칠째 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하아…”
작게 새어 나온 한숨은 곧 허공으로 흩어졌다.
텅 빈 매장 안은 거대한 동굴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천장에서 떨어진 거대한 샹들리에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철골 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지우는 스포츠 용품 코너로 향했다. 다른 녀석들이 건드리지 않을 만한 곳.
그때였다. 삐그덕거리는 소리.
금속이 마찰하는 듯한 소리에 지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발악했다. 혹시… 녀석들이?
숨을 죽이고 소리의 근원지를 좇았다. 먼지 쌓인 진열장 뒤편,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곳. 그곳에는 한 ‘존재’가 있었다.
녀석이었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과는 달랐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찢겨나간 운동화 상자의 뚜껑을 열어, 그 안을 응시하는 모습은 섬뜩할 만큼 고요했다. 일반적인 녀석들이라면 킁킁거리며 먹잇감을 찾거나, 굶주린 울부짖음을 토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마치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사람처럼, 상자 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창백한 피부는 얼룩덜룩했고, 찢겨나간 옷가지 사이로 드러난 맨살은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 핏발 선 노란 동공이 아니라, 희미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꼭… 내가 아는 사람의 눈처럼.
공포와 함께 기묘한 이끌림이 지우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상자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느리게, 아주 느리게 지우가 숨어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심장은 고통스러울 만큼 빠르게 뛰었다. 들켰다. 이제 끝이다.
그런데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지우를 쳐다볼 뿐이었다. 호기심 어린, 아니면 슬픔이 깃든 듯한 그 눈빛에 지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그때, 멀리서 녀석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가까운 거리였다.
지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크르르르…”
백화점의 입구를 향해 몸을 돌린 그녀의 뒷모습은 기묘한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우르르, 하는 발소리. 그리고 이내 세 마리의 녀석들이 매장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지우의 냄새를 맡고 달려든 것이 분명했다.
녀석들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지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낡은 칼을 움켜쥐었지만, 세 마리를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절망적인 순간, 그의 눈앞에 그림자가 덮였다.
움직인 것은 그녀였다.
인간의 움직임이라기엔 너무나 빠르고 유연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려 가장 앞서 달려오던 녀석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녀석은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이어지는 움직임은 예술에 가까웠다. 두 번째 녀석이 달려들자, 그녀는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고는 그대로 녀석의 머리를 붙잡아 진열장에 강하게 내리쳤다. 유리와 함께 녀석의 두개골이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지우는 얼어붙은 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그녀는… 그들을 죽였다. 다른 녀석들을. 자신의 종족을.
마지막 한 마리가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쳤지만, 그녀는 이미 녀석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톱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일격에 녀석의 심장을 꿰뚫었다.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채, 천천히 몸을 돌려 지우를 바라봤다.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는 여전히 깊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했다. 죽음의 잔해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본능이 도망치라고 외쳤다. 괴물이다. 저것은 괴물이다. 하지만 지우의 몸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그녀의 손을 향했다. 핏기 없는 손등에는 오래된 흉터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또 한 걸음.
점점 더 가까이.
그녀의 발소리는 조용했고, 그 안에는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고요했다.
내 앞에 멈춰 선 그녀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손을 뻗었다. 핏기 없는 차가운 손가락이 지우의 뺨에 닿았다. 소름 돋아야 마땅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이 차가운 접촉이 낯설지 않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쉰 듯한 목소리, 바람이 새는 듯한 발음. 분명 인간의 언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질문이 담겨 있었다.
마치, ‘괜찮아?’ 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지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괴물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성을 잃은 녀석들과는 다르지만, 분명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방금 그녀는 자신을 구했다. 그리고 지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은 나에게 ‘괴물’이라고 가르쳤다. 감정이 없는 살육병기. 하지만 내 앞에 선 그녀는… 내 생명을 구했다. 인간의 언어를 잃었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무언가를 가진 존재.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마치, 이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 넌…”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대로 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지우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낡은 운동화 상자를 가리켰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자신을 설명하려는 듯했다.
지우는 홀린 듯 상자로 시선을 옮겼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소녀가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운동화를 든 채 서 있는 모습은… 지금 눈앞의 그녀와 기묘하게 겹쳐졌다.
그녀는 입을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명확하게, 하지만 여전히 쉰 목소리로.
“리… 나…”
지우는 얼어붙었다. 리나.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인가?
그는 망설이던 손을 들어, 그녀의 차가운 손을 감쌌다. 끈적이는 피가 묻어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차가운 손아귀에서, 아주 희미하게나마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위험한 도박이 시작되었다. 금지된,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지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 만남은 분명 세상의 어떤 법칙에도 어긋나는 것이었지만,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 그는 이미 모든 법칙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저, 이 기묘한 존재와의 연결이, 그를 사로잡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괴물’이 아닌, ‘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존재를 향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그들 사이의 금지된 서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