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204호. 김현우는 캔맥주를 따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길고 지루했던 회의 끝에 찾아온 이 평화가 세상 어떤 보상보다 달콤했다. 폰으로 배달 앱을 열어 피자를 주문하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영화 한 편과 함께 완벽하게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어라?”
리모컨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손에 닿기 직전 마치 누군가 툭 건드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액정 화면에 익숙한 로고가 뜨고, 메인 화면이 나타났다. 다행히도 영화는 시작부터 흥미로워 보였다. 치즈가 듬뿍 올라간 피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현우는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거울 앞에 서서 손을 씻는데,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 창문을 닫아 놓아 공기는 퍽퍽할 정도로 답답했는데, 피부가 곤두서는 차가운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스며드는 듯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피곤에 절어 약간 핼쑥했지만, 그 외엔 특별한 점이 없었다. 물방울이 맺힌 거울은 희미하게 그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과로다. 틀림없이.
세면대 수도꼭지를 잠그고 돌아서려는데, 벽에 걸린 수건이 스르륵 미끄러져 떨어졌다. 마치 누군가 잡아당긴 것처럼. 현우는 순간 숨을 멈췄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기이하게 느껴졌다. 수건 걸이는 분명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떨어진 수건을 주워 다시 걸었다.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화장실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그새 영화는 시작되어 화면 가득 폭발음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으려다 멈칫했다.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잔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테이블이 통째로 떨리는 것도 아니고, 오직 유리잔 하나만이. 투명한 물결이 잔 안에서 일렁였다.
“이게… 뭐지?”
그는 손을 뻗어 잔을 잡았다. 그러자 흔들림이 뚝 멎었다. 마치 자신의 움직임을 기다렸다는 듯이. 현우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평생 그런 유별난 일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섬뜩한 상상력이 그의 뇌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는 유리잔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은 온통 차분했다. 소파, TV, 책장. 모든 것이 제자리에 완벽하게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벽 한쪽에 세워둔 장식장 위에서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액자 하나가 떨어졌다. 액자는 바닥에 부딪히며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현우는 벌떡 일어섰다. 그 액자는 분명 장식장 안쪽으로 밀어 넣어둔 것이었다. 바깥으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그것도, 마치 누군가 손으로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정확히.
차가운 공기가 발목을 감싸는 듯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 화장실에서 느꼈던 그 차가운 기운이 다시 한번 온몸을 에워싸는 것 같았다.
“누구… 없어?”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영화에서 들려오던 배우들의 대화 소리가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얄밉게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깨진 액자 쪽으로 다가갔다. 액자 속 사진은, 몇 년 전 친구들과 함께 여행 가서 찍은 것이었다. 일그러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액자 조각들을 치우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아래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려는데, 갑자기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졌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식칼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채 뒹굴고 있었다. 칼날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번쩍였다.
그 칼은 분명 칼꽂이에 꽂혀 있었다. 누가 꺼내서 떨어뜨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툭, 하고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현우의 심장이 발작하듯 쿵쾅거렸다. 이젠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에 손으로 목덜미를 감쌌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손바닥이 느껴졌다. 아니, 손바닥이 아니라… 목덜미 자체가 차가웠다. 마치 얼음물을 부은 것처럼.
“나가… 나가라고!”
현우는 소리쳤다. 떨리는 목소리가 집안에 공허하게 울렸다. 아무 대답도, 반응도 없었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턱 끝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거실에서 다시 한번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명확했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현우는 숨을 헐떡이며 거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TV 화면이었다.
TV는 완전히 꺼져 있었다. 아까 분명 틀어놓았던 영화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 손가락으로 꾹 누른 듯한 하얀 지문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는 얼어붙은 채 그 지문을 응시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지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희미하고 가늘어서 환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현우는 똑똑히 들었다.
*…왔어?*
낮고 음습한, 마치 수백 년 묵은 흙먼지에서 긁어낸 듯한 목소리.
현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손이 저절로 바지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웠지만 겨우겨우 잠금을 풀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상황을 설명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친구, 가족, 하다못해 경찰이라도!
떨리는 손으로 엄마의 번호를 찾아 겨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을 때였다.
‘콰앙!’
이번에는 안방 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거대한 유리가 깨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집안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어둠이 현우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휴대폰 액정만이 유일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엄마의 통화가 연결됨과 동시에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현우야? 왜 전화했어?”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척과, 깨진 유리 파편들이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가득 채웠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무엇’은 그의 존재를 이미 눈치챈 듯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강력한 확신과 함께.
그리고 그 순간,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그의 휴대폰 너머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엄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집에서 들려오는 비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