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숲의 심장부, 버려진 채 잊혀진 옥상 정원은 스산한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립된 세계였다. 한때 화려했을 꽃들은 시들어 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이파리 없는 덩굴들만이 앙상하게 철제 구조물을 휘감고 있었다. 도윤은 숨을 헐떡이며 이아의 가는 어깨를 감쌌다. 등 뒤로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그 빛은 따스함 대신 차가운 감시의 눈동자처럼 느껴졌다.
이아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가로등 불빛에 섬뜩하게 빛났다.
“도윤… 미안해.”
이아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속삭였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는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도윤의 옷깃을 움켜쥔 손가락은 힘없이 파르르 떨렸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도윤은 그녀의 어깨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이곳은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했다. 그는 불과 몇 분 전, 그들을 턱밑까지 쫓아왔던 그림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아의 종족, 밤의 그림자에 속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차가웠고, 경고는 명확했다.
“우리가… 우리가 저지른 일은 용서받지 못할 거야.”
이아의 말은 비수처럼 도윤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이 그녀가 느끼는 공포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용서받지 못하면 어때.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이아.”
도윤은 억지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의 손이 이아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가운 그녀의 피부가 그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흡수하길 바라면서.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길고 어두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내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는 규율이자 법이야. 그런데 내가, 감히 인간과… 이런 관계를 맺었으니.”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아의 눈물은 마치 유리 구슬처럼 투명하고 빛났다.
“이제 정말 끝인 것 같아, 도윤. 우리… 이 이상은 안 돼.”
도윤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끝낼 수 없어. 널 포기할 수 없어.”
그는 이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가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내 세상은 달라졌어. 어두웠던 모든 것이 선명해졌고, 의미 없던 모든 것이 특별해졌어. 널 포기하는 건,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아.”
이아는 그의 말에 잠시 잊었던 듯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빛에 아주 희미한 희망의 그림자가 스쳤다. 하지만 그 희망은 곧 차가운 현실에 잠식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에게는 중징계가 내려질 거고, 너는… 너는 기억을 잃게 될지도 몰라. 그게 그들의 방식이야.”
도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 이아에 대한 모든 추억이 사라지고, 마치 그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조여왔다.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을 거야.”
“어떻게? 네가 어떻게 막을 수 있어? 그들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존재들이야. 너는…”
이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녀는 도윤이 자신과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그를 상기시키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싸아아아…*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고요 속에, 아주 미세한, 그러나 이아의 예민한 감각에 포착된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발자국 소리…”
이아가 몸을 굳혔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익숙해… 아주 익숙한 발자국 소리야.”
도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파리 없는 덩굴들이 밤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웅성거림.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아는 틀린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감각은 인간과는 달랐다.
“누구야?”
도윤의 목소리에 날카로움이 섞였다.
“그들이… 다시 온 거야.”
이아는 거의 울부짖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시자야. 그가 우리를 찾아냈어.”
옥상으로 이어지는 비상계단 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낡은 금속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비명처럼 처절했다. 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숨을 만한 곳은 더 이상 없었다. 옥상 위는 사방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호리호리한 체형, 밤색 옷을 입었지만 그 어떤 위장술보다도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였다. 그의 얼굴은 밤하늘처럼 검은 망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깊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눈은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형형했다.
그는 이아의 친오라버니, 동시에 그녀의 감시자이자 심판자 역할을 하는 자였다. 그의 이름은 ‘카엘’. 그는 밤의 그림자 종족에서 가장 냉정하고 잔혹한 규율 집행자로 통했다.
카엘은 천천히, 마치 먹이를 조롱하듯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 하나 없이 옥상 바닥에 닿았다. 주변의 낡은 철제 구조물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희미하게 떨리는 듯했다.
“이아.”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밤공기처럼 날카로웠다. 심장을 꿰뚫을 듯한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규칙을 어긴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이아는 도윤의 뒤로 숨으려 했지만, 이미 다리가 풀려 움직일 수 없었다. 도윤은 그녀를 자신의 등 뒤에 완전히 감춘 채, 카엘을 노려보았다.
“물러서.”
도윤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카엘의 시선이 도윤에게 닿았다. 인간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인간. 너는 감히 우리의 영역을 침범했다. 그녀의 영혼을 더럽혔고, 우리의 질서를 파괴하려 했다.”
카엘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차가운 분노와 경멸만이 느껴졌다.
“인간과의 유대는 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이아. 이 배신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카엘의 손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어둠이 피어오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도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것은 단순한 주먹이나 발길질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마치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
“이아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도윤이 소리쳤다. 그는 이아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더욱 단단히 세웠다.
카엘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죄는 이미 네 존재 자체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너의 죄는…”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을 존재하게 만든 것.”
어둠이 손끝에서 응축되어 칼날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질적인 칼날이 아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인식조차 하기 힘든, 존재 그 자체를 지워버릴 듯한 무형의 힘이었다.
도윤은 이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는 결코 놓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그 끝이 자신의 소멸이라 할지라도.
카엘의 손에서 피어난 어둠의 칼날이 섬광처럼 두 사람을 향해 뻗어 나갔다.
옥상 정원을 감싼 밤공기가 울부짖는 듯했다.
“도윤…!”
이아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