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은 핏빛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노을이 아니었다. 도심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화염과 폭발이 빚어낸 지옥의 색채였다. 부서진 고층 빌딩의 뼈대가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하늘을 긁었고, 지면은 파헤쳐진 살점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진, 좌측 3도! 매복 확인!”
통신망을 찢는 사령관 강혁의 다급한 목소리에 진은 반사적으로 [돌격병]의 조종간을 틀었다. ‘돌격병’이라 불리는 진의 기체는 제국군이 자랑하는 유려한 ‘제국 기사’ 메카와는 거리가 멀었다. 녹슨 장갑 곳곳에는 급조한 보강판이 덧대어져 있었고, 엔진은 쿨링액이 끓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겨우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투박한 철덩어리는 자유를 향한 평민들의 열망을 담아 수많은 전투를 버텨낸 상징이었다.
철컥거리는 구동음과 함께 기체가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다. 빌딩 잔해 뒤편에서 튀어나온 제국 보병들이 휴대용 대전차 로켓을 조준하는 것이 보였다.
“젠장!”
진은 욕설을 내뱉으며 어깨에 장착된 개틀링 포의 방아쇠를 당겼다. ‘우르르르릉!’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굵은 탄환들이 불을 뿜으며 쏟아져 나갔다. 콘크리트 파편과 비명이 뒤섞이며 제국 보병들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훌륭하다, 진! 그대로 전진. 목표는 제7 에너지 증폭기. 저곳만 마비시키면 이 구역의 제국군 통신망과 방어막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다운된다. 그때 본대가 돌입할 것이다.”
강혁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이번 작전은 반란군에게 너무나 중요한 기회였다. 제국 수도의 외곽을 코앞에 둔 이 최전선에서, 제대로 된 반격 한번 없이 계속 밀리기만 한다면 사기는 바닥을 칠 터였다.
진은 거친 숨을 내쉬며 조종간을 꽉 쥐었다. 이 작은 승리가, 언젠가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릴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티는 매 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제7 증폭기는 저희가 접수합니다!”
진의 옆으로는 동료들의 기체, ‘척후병’과 ‘수호자’가 바싹 붙어 이동하고 있었다. 척후병의 조종석에서는 동료 지혁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낡고 삐걱거리는 기체들 사이에서도 전우애만큼은 굳건했다.
“젠장, 저놈의 제국 기사들은 지겹지도 않나!”
수호자의 조종사, 미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그들의 전방, 무너진 고가도로 너머에서 은색으로 번쩍이는 제국 기사 두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 기사는 매끄러운 외형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레이저 포와 충격 도끼를 장비하고 있었다.
“후퇴는 없다! 목표는 저 증폭기다!” 진은 단호하게 외쳤다. “지혁, 우회해서 증폭기 건물로 직접 침투할 수 있는지 확인해라! 미나, 나와 함께 저놈들을 막는다!”
“알았어, 진! 하지만 이놈들, 지난번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데?” 미나가 엄살을 부리듯 투덜거렸다.
“걱정 마, 미나! 우리가 더 단단하다!”
진은 망설임 없이 [돌격병]을 제국 기사들을 향해 돌진시켰다. 낡은 엔진이 끓어오르듯 최고 출력을 뿜어냈다. 지면이 [돌격병]의 육중한 발걸음에 쿵, 쿵 울렸다.
제국 기사 한 대가 팔에 장착된 레이저 포를 진에게 겨눴다. 순식간에 푸른빛 에너지 구체가 발사되었고, 진은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회피했다. 에너지 구체는 진의 뒤편에 있던 잔해 더미에 명중했고,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콘크리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시에 개틀링 포를 다시 발사했다. ‘우르르르릉!’ 탄환이 제국 기사의 어깨 장갑에 명중했지만, 단단한 특수 합금 장갑에는 흠집만 낼 뿐이었다.
“쳇, 소용없나!”
그때, 미나의 [수호자]가 다른 제국 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수호자]는 두터운 방어력과 강력한 근접 무기, 거대한 강철 방패를 주무기로 삼는 기체였다. 미나는 방패를 앞세워 제국 기사의 공격을 막아내며 거리를 좁혔다.
“이거나 먹어라! 녹슬어 빠진 고철 덩어리!”
미나가 조종간을 꺾자 [수호자]는 어깨에 장착된 대형 숄더 태클로 제국 기사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콰아앙!’ 금속이 뒤틀리는 굉음과 함께 제국 기사가 휘청거렸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미나는 팔에 장착된 충격 도끼를 휘둘렀다. ‘챙그랑!’ 도끼가 제국 기사의 다리 장갑을 스쳤지만, 깊은 손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젠장, 단단하기는 드럽게 단단하네!” 미나가 다시 투덜거렸다.
진은 제국 기사가 미나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제국 기사들은 이미 그들의 전술을 파악한 듯 움직였다. 한 대가 미나를 견제하는 동안, 다른 한 대가 빠르게 진의 경로를 차단하며 거대한 충격 도끼를 휘둘렀다.
“위험해, 진!” 미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진은 기체를 뒤로 빼려 했지만, 제국 기사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빨랐다. ‘콰직!’ [돌격병]의 팔 장갑에 충격 도끼가 그대로 박혔다. 억센 금속이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조종석 내부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좌측 팔 구동계 이상! 출력 20% 감소!”
진은 이를 악물었다. 통증이 없는 곳은 없었다. [돌격병]은 진의 몸과 같았다. 부상을 입은 기체를 움직이는 것은 마치 자신의 부상당한 팔다리를 휘두르는 것과 같았다.
“젠장, 이대로는 안 돼!”
진은 망가진 팔로 제국 기사의 도끼를 억지로 밀어내려 했다.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파크와 함께 [돌격병]이 거칠게 떨렸다. 그는 제국 기사의 육중한 몸체에 매달리듯 버텼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진, 이쪽은 침투 경로 확인! 제7 증폭기 건물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 그때, 지혁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들려왔다.
“좋아, 지혁! 그대로 진행해! 미나, 나를 엄호하면서 증폭기 건물 입구 쪽으로 유인해!” 진은 재빨리 판단했다.
“알았어, 진!” 미나의 [수호자]가 전열을 정비하며 다시 제국 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이번에는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방패를 이용한 견제와 충격 도끼로 경로를 막는 데 집중했다.
진은 부상당한 [돌격병]을 이끌고 미나의 뒤를 따랐다. 제국 기사들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끈질기게 추격해왔다. 레이저 포탄이 연신 진의 주변에 작렬했고, 충격파가 [돌격병]을 뒤흔들었다.
간신히 제7 증폭기 건물 입구에 다다른 순간, 지혁의 [척후병]이 건물 내부에서 연막탄을 터뜨리며 나타났다. 흰 연기가 순식간에 건물 입구를 뒤덮었고, 제국 기사들의 시야를 가렸다.
“진! 미나! 어서 들어와!” 지혁이 외쳤다.
진은 망설임 없이 연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돌격병]의 육중한 몸체가 건물 입구를 간신히 통과했다. 뒤이어 미나의 [수호자]도 연막을 뚫고 들어왔다. 연막 뒤편에서는 제국 기사들의 분노에 찬 엔진 소리가 울렸다.
건물 내부는 어둡고 거대한 기계 장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에너지 코어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제국군의 에너지 증폭기였다.
“지혁, 시스템 해킹 시작해! 미나, 입구 봉쇄 준비! 제국 기사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진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지혁은 [척후병]의 팔을 개조한 해킹 장비를 거대한 제어 패널에 연결하기 시작했다. [척후병]은 전투보다는 정찰과 전자전 능력이 특화된 기체였다.
“시간이 얼마 없어, 진! 이 건물 방어 시스템이 곧 제국군에게 재활성화될 거야!” 지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때, 건물 입구 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쾅!’ 제국 기사들이 건물을 뚫고 들어오려는 듯 입구를 공격하는 소리였다.
“젠장! 생각보다 빠르잖아!” 미나가 방패를 들어 입구를 향해 겨누며 외쳤다. [수호자]의 팔에 장착된 용접기가 불꽃을 뿜으며 입구를 용접하기 시작했지만, 제국 기사들의 공격 앞에서는 한계가 명확했다.
진은 [돌격병]의 망가진 팔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팔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오른쪽 팔의 개틀링 포는 살아 있었다.
“내가 시간을 벌겠다! 지혁, 서둘러!”
진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제7 증폭기 내부의 거대한 에너지 코어를 향해 개틀링 포를 조준했다. 코어를 직접 파괴할 수는 없었다. 증폭기에 과부하를 걸어 시스템을 다운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강혁 사령관님, 제7 증폭기 시스템 해킹 중! 잠시 후 모든 시스템 마비됩니다!” 진은 통신망에 대고 보고했다.
“훌륭하다, 진! 그동안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다!” 강혁의 목소리에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우르르르릉!’ 진은 개틀링 포의 방아쇠를 당겼다. 굵은 탄환들이 에너지 코어 주변의 제어반과 보조 시스템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스파크가 튀고, 전선이 끊어지며 ‘삐이익!’ 하는 고주파음이 건물 내부를 가득 채웠다.
‘콰아앙!’ 마침내 미나가 막고 있던 입구의 방어막이 뚫리고, 제국 기사 두 대가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그들의 눈동자처럼 빛나는 센서가 진과 지혁을 향해 번뜩였다.
“진, 시스템 셧다운까지 10초! 9, 8…” 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국 기사 한 대가 진을 향해 레이저 포를 발사했다. 진은 기체를 굴려 겨우 피했지만, 레이저 포탄은 에너지 코어 바로 옆의 제어 패널을 명중시켰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코어의 빛이 불안정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젠장, 위험하다!”
또 다른 제국 기사가 충격 도끼를 휘두르며 진에게 달려들었다. 진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돌격병]의 망가진 팔을 겨우 들어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진!” 미나가 절규하듯 외쳤다.
‘콰직!’ 충격 도끼가 [돌격병]의 어깨 장갑에 그대로 박혔다. 조종석이 심하게 흔들렸고, 진의 몸이 충격에 이리저리 부딪혔다.
“1초! 셧다운!”
지혁의 외침과 동시에, 건물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거대한 에너지 코어의 빛이 폭주하듯 밝아졌다가, ‘쉬이이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모든 빛을 잃었다. 모든 기계음이 멈추고, 건물은 암흑과 정적에 휩싸였다.
성공이었다. 제7 에너지 증폭기가 마비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건물 밖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땅이 울리고, 천장의 잔해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그르르르릉….’
어둠 속에서, 진은 겨우 고개를 들어 건물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마비된 증폭기 너머, 핏빛 노을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제국 기사’와는 차원이 다른, 산을 깎아 만든 듯한 육중한 실루엣이었다. 엄청난 압도감이 진의 숨통을 조여왔다.
“이건… 대체…?” 미나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떨렸다.
그 거대한 존재의 어깨에는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섬뜩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셀 수 없이 많은 제국 기사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제7 증폭기는 마비되었지만, 그들은 이미 새로운 적과 마주하고 있었다. 훨씬 더 거대하고, 강력하며, 절망적인 존재와…
진은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막 작은 승리를 쟁취했다고 생각했지만, 제국은 더 깊고 어두운 심연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절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