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균열의 속삭임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 이름만으로도 마나의 파동이 느껴지는 이 고귀한 전당에 발을 들인 지 어느덧 두 달이었다. 뾰족한 첨탑들이 하늘을 꿰뚫을 듯 솟아 있고, 그 사이를 잇는 부유 교량 위로는 온갖 색깔의 마법진이 쉴 새 없이 반짝였다. 투명한 마나 결정으로 지어진 도서관은 새벽 이슬을 머금은 듯 영롱하게 빛났고, 연병장에서는 폭발하는 불꽃 마법과 땅을 뒤흔드는 진동 마법이 수없이 교차했다.
여긴 꿈같은 곳이었다. 어릴 적 찢어진 마법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며 마법사를 꿈꾸던 시골 소년에게는 더더욱. 그리고 그 소년은 기어코 이 거대한 아르카디아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름은 카이.
“카이! 또 딴생각이지?”
누군가 옆구리를 쿡 찔러왔다. 정신없이 마법진의 흐름을 쫓던 카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태양처럼 타오르는 친구, 엘라였다. 엘라는 심통 난 표정으로 카이의 마나 제어석을 가리켰다. 푸르게 빛나야 할 제어석은 불규칙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미안, 엘라. 잠시 딴생각을….”
“잠시가 아니잖아. 카이, 집중해야 해. 오늘 ‘정화의 격류’ 마법은 좀 더 복잡하다고!”
엘라의 말은 옳았다. 아르카디아의 수업은 늘 강도 높았다. 특히 고위 마법의 기본이 되는 마나 제어 훈련은 매일 수십 번, 수백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카이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흐트러진 마나를 다시 끌어모았다. 손바닥 안의 제어석이 차분한 푸른빛을 되찾았다.
“그래도 오늘은 좀 이상하지 않아?” 엘라가 투덜거렸다. “바닥에서 뭔가 웅웅거리는 느낌이 드는데.”
“웅웅거린다고?”
“응. 아주 미세하게, 심장 박동 같기도 하고… 꼭 학원 지하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 엘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는 잠결에 듣고 잠투정인가 했는데, 오늘은 수업 중에도 느껴져. 혹시 대지 마법 수업이라도 있나?”
“대지 마법은 다음 주잖아.” 카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원 지하에서 특별한 수업이 진행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지하의 깊은 곳은 일반 학생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제한 구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카이는 엘라와 함께 식당으로 향하면서도 엘라의 말을 곱씹었다. ‘웅웅거리는 느낌.’ 마나에 예민한 엘라가 느꼈다면 단순한 착각은 아닐 터였다.
식당은 늘 활기로 가득했다. 허기를 채우며 카이는 우연히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선배들인 듯한 몇몇 학생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확실해? 정말 그쪽에서 나온다고?”
“밤마다 그래. 어두컴컴한 심야에, 마치… 땅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처럼.”
“젠장, 금서 목록에 있던 ‘심연의 기록’인가 뭔가 하는 책도, 그 지하실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고 하던데.”
“미쳤어? 그거 읽다가 발각되면 당장 퇴학이야! 학칙 제1조가 ‘미지의 심연에 대한 탐구를 금한다’잖아!”
카이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미지의 심연’. ‘지하실’. ‘금서’.
엘라가 말한 웅웅거림과 선배들의 대화가 기묘하게 겹쳐졌다. 단순한 소문일까? 아니면…
그날 밤, 카이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엘리트 마법 학원의 지하에 끔찍한 금기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은 어릴 적 들었던 괴담처럼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벗어나 학원의 거대한 도서관으로 향했다. ‘금서 목록에 있던 책’이라는 선배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서관의 가장 깊숙한 곳, 낡은 마법으로 봉인된 ‘고대 자료실’은 늘 비어있었다. 평소에는 접근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어쩐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기분이었다. 먼지 쌓인 통로를 지나 봉인된 문 앞에 섰다. 마나 감지 마법을 써보니, 봉인 자체는 약하게 걸려 있었다. 아마도 더 이상 아무도 이곳에 흥미를 갖지 않으리라 판단했거나, 혹은 일부러 허술하게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는 조심스럽게 마나를 주입하여 봉인을 해제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문이 열렸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빽빽하게 꽂힌 서가들 위로는 두터운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손에 든 마나 등불을 밝히며 서가를 훑었다. 대부분은 아르카디아의 건립 역사나 고대 마법의 이론에 대한 지루한 서적들이었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검은색 낡은 가죽으로 장정된 두꺼운 책이었다. 책등에는 아무런 제목도 없었지만, 묘하게 카이의 시선을 끌었다. 마치 그 책이 자신을 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책을 뽑아내자, 숨겨져 있던 공간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구겨지고 해진 종이에는 붉은색 잉크로 알 수 없는 기호들과 함께 손으로 그린 듯한 조잡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아르카디아 학원의 지하였는데, 카이가 알고 있는 가장 깊은 지하 창고보다 훨씬 더 아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제0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0층의 한가운데에는 섬뜩한 형상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카이는 지도를 펼쳐 들고 책상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검은색 책을 펼치자, 섬뜩한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대 문자로 쓰여 있었지만, 카이는 장학생 특전으로 배운 고대어 지식으로 겨우 내용을 해독할 수 있었다.
“…심연에 봉인된 존재… 학원의 뿌리… 금지된 힘… 균열… 먹이를 탐하는 자….”
내용은 혼란스럽고 단편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르카디아 학원 지하에, 인류에게 치명적인 어떤 존재가 봉인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학원이 세워졌다는 끔찍한 암시까지.
책을 읽는 동안, 카이의 손은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아주 미세한, 그러나 명확한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져 왔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 같았다. 엘라가 말했던 그 ‘웅웅거림’이었다. 진동은 점점 강해졌고, 카이는 본능적으로 지도가 가리키는 제0층의 방향, 즉 도서관 바로 아래의 심연을 직감했다.
동시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한이 밀려왔다.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피부가 마비되는 듯한 냉기, 그리고 저 깊은 곳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듯한 역겨운 쇠 비린내.
책 속의 끔찍한 문양이 그의 눈앞에서 일렁이는 듯했다.
카이는 지도를 움켜쥐고 고대 자료실을 뛰쳐나왔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저 아래에 무엇이 있는가?*
지도는 도서관 지하의 은밀한 통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래된 관리용 통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곳. 카이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 마나 등불만이 흔들렸고, 그의 심장은 쿵쿵거리는 지하의 박동과 함께 격렬하게 울렸다.
마침내, 지도가 가리키는 곳에 도착했다. 낡은 벽돌로 위장된 좁고 낮은 통로의 끝. 그곳에는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그러나 마나 감각으로는 명확하게 느껴지는 봉인된 문이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 봉인과는 다른, 고대의 기법으로 만들어진 듯한 문이었다.
카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문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 같은 질감. 그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한기가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동시에 봉인된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쿠우우우우웅… 쿠우우우우웅…**
마치 거대한 짐승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뒤척이는 듯한 소리.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아주 희미하지만 섬뜩하게 긁는 듯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어였지만, 그 의미는 분명히 ‘열어라’ 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카이의 마나 등불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꺼지려 했다. 그는 온몸의 힘을 다해 문을 밀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틈새가 아주 미세하게 벌어졌다.
그 틈새 너머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붉고 거대한, 마치 거대한 눈동자 같은 섬광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는 듯했다.
그 순간, 카이의 머릿속을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갑고, 날카로우며, 온 세상의 모든 절규를 담은 듯한, 이질적인 비명이었다.
학원 지하 깊은 곳에서, 금기가 깨어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