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고, 창밖으로는 희미한 달빛만이 미나의 방을 간신히 밝히고 있었다. 침대맡 스탠드의 따뜻한 불빛 아래, 미나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어제 읽었던 페이지의 잔향이 여전히 가슴에 남아 아릿했지만,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은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으로 미나를 잡아끌었다.
할머니, 순옥의 젊은 시절 목소리가 손때 묻은 종이 위에서 다시 울려 퍼지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글씨체는 여전히 단정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떨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 페이지 사이, 얇게 말라버린 작은 야생화 한 송이가 고이 끼워져 있었다. 빛바랜 꽃잎은 시간을 말해주듯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미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꽃향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그 속에 담긴 할머니의 마음은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1958년 늦가을, 차가운 바람이 불던 날
“지훈아, 정말 가야만 하는 거니?”
내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허공으로 흩어지는 낙엽처럼 힘없이 떨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았다. 거칠지만 따뜻한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나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우리는 마을 어귀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서 있었다. 앙상한 가지들은 차가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발밑에는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밟을 때마다 서글픈 소리를 냈다.
지훈은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쉬었다. “순옥아, 미안하다. 이대로는 안 돼. 서울에 가면 일자리가 많대. 돈을 벌어서… 꼭 돌아올게. 너와 함께 작은 집이라도 짓고, 텃밭을 일구면서 평생 살고 싶어.”
그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결심과 함께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가난은 우리에게 사랑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무서운 적이었다. 지훈의 가족들은 전쟁 후 폐허가 된 집을 복구할 돈이 필요했고, 나의 집 또한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는 장남이었고, 나는 그의 미래를 막을 수 없었다.
“정말… 정말 올 거지? 기다릴게. 언제까지라도 기다릴게.”
나의 눈에는 이미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나와 같은 슬픔,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맹세해. 이 느티나무가 천년만년 그 자리를 지키듯이, 나도 너에게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변치 말고 나를 기다려줘. 그리고… 이걸…”
그는 품속에서 손수건에 싸여 있던 작은 돌멩이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매끄럽고 둥근 돌멩이였다. “이 돌은 우리 마을을 흐르는 시냇물에서 주운 거야. 이 시냇물처럼 우리의 마음도 변치 않을 거라는 뜻으로.”
나는 돌멩이를 꼭 쥐었다. 차갑던 돌은 그의 손에서 옮겨진 온기로 인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의 품은 세상의 어떤 품보다도 따뜻하고 든든했다. 헤어지기 싫은 마음에 그의 등을 부여잡고 한참을 흐느꼈다.
“꼭 돌아와야 해… 꼭…”
그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점처럼 작아질 때까지, 나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내 가슴에는 그가 남긴 돌멩이와 함께, 기약 없는 기다림과 아련한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너무나도 연약해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것만 같았다.
미나는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며 할머니의 눈물과 함께 자신의 눈가에도 촉촉함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지훈이라는 이름, 느티나무 아래에서의 약속, 그리고 작은 시냇물 돌멩이. 이 모든 것이 마치 눈앞에 그려지듯 선명했다. 미나는 할머니가 평생 간직해온 그리움의 크기를 이제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껏 미나는 할머니가 그저 연륜 깊은 현명한 어른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일기장 속의 할머니는 사랑 앞에서 한없이 여리고 불안해하며,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한 명의 소녀였다. 그녀의 사랑은 그 시대의 가난과 사회적 압력 속에서 피어난, 그러나 너무나도 쉽게 꺾일 수밖에 없었던 슬픈 꽃이었다.
미나는 할머니가 끼워 두었던 야생화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 꽃은 지훈과의 마지막 순간을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말없이 피어났던 수많은 희망의 조각일까? 할머니의 삶 속에 이토록 애틋하고 절절한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니. 미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문득, 일기장 다음 페이지에 작은 글씨로 짧게 쓰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후 몇 년이 흘렀지만…
그 뒤의 내용은 없었다. 마치 할머니가 차마 더 이상 쓸 수 없었던 것처럼, 혹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펜을 놓아버린 것처럼. 미나의 심장은 더욱 세게 뛰었다. 지훈은 과연 돌아왔을까? 아니면 할머니는 평생을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살았던 것일까?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다음 페이지는 텅 비어 있었다. 미나는 다음 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그리고 그 다음 장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한 문장을 발견하고는 숨을 헙 들이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