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4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펼치자, 종이 사이에서 마른 꽃잎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바싹 마른 작고 연약한 꽃잎은 손가락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부스러질 것 같았다. 지혜는 조심스럽게 꽃잎을 집어 들었다. 어떤 꽃이었을까. 할머니는 이 꽃잎을 왜 이토록 소중히 간직했을까.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지혜의 가슴을 저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일기장은 늘 그렇듯, 낡고 바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숨을 고르고 다음 장을 넘겼다. 지난번 읽었던 내용이 할머니의 학창 시절 순수했던 우정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 장은 잉크가 번지고 글씨체가 흐트러진 것으로 보아, 할머니의 감정이 격정적으로 요동쳤던 순간의 기록인 듯했다.

1958년 늦은 봄, 종로 거리에서

…그날, 종로 거리에서 우연히 그이를 다시 만났을 때, 내 세상은 흑백에서 단숨에 총천연색으로 변하는 듯했습니다. 처음 만났던 동네 우물가에서도 그리 심장이 뛰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인파 속에서 홀로 빛나는 그이를 발견했을 때, 나는 마치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 서 버렸습니다.

“선영 씨?”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갓 피어난 아카시아꽃 향기처럼 달콤했고, 눈빛은 깊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습니다. 준호 씨… 그의 이름은 입안에서 맴돌기만 해도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이상한 기운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내가 다니는 여학교 근처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습니다. 낡은 책 냄새가 좋아서,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 선영 씨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고요. 아아, 그 말 한마디에 내 모든 불안은 녹아내리고, 가슴은 벅찬 행복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후로 우리의 만남은 잦아졌습니다. 학교가 파하면 일부러 서점을 한 바퀴 돌고 오곤 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창가 자리에서 책을 읽거나, 손님들에게 능숙하게 책을 권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건네주는 새 책의 잉크 냄새와 오래된 책들의 퀴퀴한 종이 냄새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 냄새 속에서 우리는 시를 읽고, 미래를 이야기하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만해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나에게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시어를 알려주었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가치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남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희망찬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여 법을 공부하겠다고 했고, 나는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서로의 꿈을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마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습니다. 그 손의 온기는 차가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잊게 할 만큼 따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땅, 혼란과 가난이 팽배한 사회에서 젊은이의 꿈은 때로 너무나 허무하게 좌절되곤 했습니다. 준호 씨는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하는 장남이었고, 그의 어깨는 늘 무거워 보였습니다. 그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영 씨,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려면,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바로잡아야 할 것 같아요.” 그의 눈빛은 결연했지만, 어딘가 불안감이 서려 있었습니다. 나는 그저 그의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준호 씨는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날, 그는 내게 작은 꽃잎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선영 씨, 이 꽃처럼, 우리의 사랑도 언젠가 다시 피어날 겁니다. 그때까지… 그때까지 부디 몸 조심하고 기다려주세요.” 그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렸고,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왜 그렇게 슬픈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만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마치 꿈처럼…

서점에 가도, 남산에 가도 그는 없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이사를 가버렸고, 아무도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 밤낮으로 울었습니다. 그가 사라진 뒤 세상은 다시 흑백으로 변한 듯했습니다. 그와의 추억만이 선명한 색채로 남아 나를 괴롭혔습니다. 왜 그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떠났을까. 나는 그에게 무엇을 더 해주었어야 했을까. 이 작은 꽃잎만이 그의 마지막 흔적이 되어, 내 심장 가장 깊은 곳에 박혀버렸습니다. 나는 그가 남긴 한 마디, ‘기다려달라’는 그 약속 하나만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버텨나갔습니다…

지혜의 손에 들려 있던 마른 꽃잎이 마치 할머니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일기장 위에 투둑, 투둑 눈물이 떨어졌다. 할머니의 젊은 날이 이토록 가슴 시린 이별과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니. 지혜는 할머니가 살아오신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할머니는 늘 온화하고 인자했지만, 가끔 먼 곳을 응시할 때면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그득한 눈빛을 보이곤 했다. 젊은 시절의 할머니에게는 그토록 애틋하고 절절한 첫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은 갑작스러운 이별로 인해 깊은 상처로 남아 평생을 따라다녔던 것이리라.

지혜는 가슴이 너무 아파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그토록 소중히 간직했던 꽃잎은, 준호라는 이름의 남자가 남긴 마지막 희망의 조각이었던 것이다. 그 남자는 왜 떠나야만 했을까. 어떤 사연이 할머니의 첫사랑을 이토록 아프게 끊어냈을까.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 속에서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지켜진 것일까.

지혜는 애써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일기장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다음 장은 찢어져 있었다. 마치 그날의 충격적인 이별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할머니가 직접 찢어내 버린 것처럼, 혹은 그 이후의 이야기가 누군가에 의해 감춰진 것처럼, 흔적만 남긴 채 뜯겨나가 있었다. 지혜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찢어진 페이지의 가장자리를 만져보았다. 마치 할머니의 끊어진 운명처럼, 다음 이야기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지혜의 가슴 속에서 할머니의 젊은 날에 대한 더 깊은 궁금증과 안타까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할머니는 과연 그 후 준호 씨를 다시 만났을까? 이 슬픈 이야기는 어떻게 끝을 맺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