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은 낡은 스탠드 조명 아래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붓을 내려놓았다. 캔버스 위에는 반쯤 완성된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검푸른색과 보랏빛이 뒤섞인 배경에 아직 별들은 찍히지 않았다. 고요한 밤이었다. 창밖에서는 간간이 자동차 소리만이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올 뿐, 그녀의 작은 작업실은 온통 적막에 잠겨 있었다.
그 적막을 깨는 유일한 소리는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지훈 DJ의 목소리였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가 시작된 지 벌써 한 시간. 서연은 매주 목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따뜻하고, 때로는 사려 깊은 위로를, 때로는 잊고 있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오늘 밤, 당신의 별은 어떤 빛을 내고 있나요? 누군가는 고독하게 빛나는 별을 보며 추억에 잠길 것이고, 또 누군가는 함께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미래를 꿈꿀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훈 DJ의 말에 서연은 저도 모르게 캔버스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별은… 어떤 빛을 내고 있었을까. 어쩌면 오래전, 누군가와 함께 약속했던 그 별을 아직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라디오에서는 이어서 한 청취자의 사연이 흘러나왔다. 오래전 헤어진 연인과 약속했던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야기였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라도 되는 듯, 서연은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다시 만날 운명이라면, 별이 쏟아지는 그 언젠가….”
사연 속 문장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순간, 빛바랜 사진처럼 선명한 기억 하나가 그녀의 눈꺼풀 안쪽에 떠올랐다.
***
그때는 열일곱이었다. 해묵은 다락방 창문 너머로 쏟아지던 별빛 아래, 현우는 서연의 손을 잡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희미하게 보이는 별들이었지만, 그에게는 우주 전체를 담은 듯 빛나 보였다.
“서연아, 저기 봐. 저게 ‘백조자리’야.”
현우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밤하늘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백조는 보이지 않았지만, 현우의 눈빛 속에서 그 형상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언젠가 꼭 우주 비행사가 되어서 저 별들 사이를 날아다니자.”
현우는 늘 그랬다. 말도 안 되는 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그 꿈을 믿는 듯한 눈빛으로 서연을 바라봤다. 서연은 그런 현우를 보며 몰래 웃음을 터뜨렸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순수한 열망에 마음이 이끌렸다.
“어떻게 우주 비행사가 돼? 우리는 그림 그리는 게 더 좋잖아.”
서연의 말에 현우는 고개를 젓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야. 꿈은 크게 꾸는 거야. 그리고 설령 우주 비행사가 못 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그림으로 이 별들처럼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약속해.”
그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서연은 피식 웃으며 그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날 밤, 그들은 서로의 그림을 교환하며 언젠가 다시 만나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자고 약속했다. 현우의 그림에는 백조자리가, 서연의 그림에는 그 백조자리를 향해 날아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는 가족과 함께 멀리 해외로 떠났고, 두 사람의 약속은 그렇게 별빛처럼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
눈을 뜨자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억 속 현우의 목소리와 지훈 DJ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 서연은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 서연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지만, 현우가 말했던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그림 속에는 늘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오래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늦은 밤, 발신자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 서연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러나 심장을 꿰뚫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연아… 나 현우야.”
서연의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질 뻔했다. 오랜 세월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이름이, 목소리가, 단숨에 그녀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이럴 리가 없었다. 그녀의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마치 귀 안에서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현… 현우?”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가늘게 떨렸다. 수화기 너머 현우의 목소리는 조금 더 차분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깊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갑자기 연락해서 많이 놀랐지.”
놀랐냐고 묻는 그의 말에 서연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놀랐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녀의 세상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듯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번호를 알았을까. 왜 이제야 연락을 했을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난 괜찮아. 넌?”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현우는 작게 웃었다.
“나도 괜찮아. 사실… 너희 동네 근처에 잠시 들어와 있어. 혹시… 시간 괜찮으면 얼굴 볼 수 있을까?”
서연은 캔버스 위 반쯤 완성된 밤하늘을 보았다. 아직 별이 박히지 않은 검푸른 하늘.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는 백조자리 그림을 그리던 현우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그를 다시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혹은, 애써 덮어두었던 기억들을 다시 마주할 용기가 있었을까.
라디오에서는 지훈 DJ의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마치 그녀의 고민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이었다.
“가끔 우리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시 마주합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꿈이든, 혹은 희망이든 말이죠. 그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저는 그저 당신의 심장이 이끄는 대로, 당신의 별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서연은 전화기를 든 손을 꽉 쥐었다. 심장이 이끄는 대로. 그녀의 심장은 지금, 격렬하게 현우라는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망설임 끝에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언제… 볼 수 있는데?”
수화기 너머 현우의 목소리에 미묘한 안도감이 섞인 듯했다.
“내일… 오후에, 괜찮을까?”
내일. 내일이면, 그녀의 오랜 과거가 현재의 문을 두드린다. 서연은 잠시 숨을 고르고, 이내 대답했다.
“응… 좋아.”
전화가 끊어지자, 작업실의 고요는 다시 찾아왔지만, 서연의 마음속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붓을 들었다. 캔버스 위, 검푸른 밤하늘에 서연은 첫 번째 별을 찍었다. 희미하지만, 단단한 빛을 내는 별이었다. 그 별은 마치, 열일곱 살의 약속을 기억하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서연은 자신이 과연 어떤 그림을 완성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일,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잃어버린 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할 것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