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15화

햇살이 창문 가득 쏟아져 내리던 오후, 지우는 낡은 작업실에서 붓을 든 채 멈춰 서 있었다. 창밖으로는 연둣빛 새싹들이 희망처럼 돋아나고, 살랑이는 바람결에 벚꽃 잎들이 눈처럼 흩날렸다. 완연한 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겨울의 잔재처럼 차가운 그리움이 녹아내리지 못하고 자리 잡고 있었다. 수아. 단 두 글자의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 때마다, 그녀의 심장은 마치 깨진 유리 조각처럼 시렸다.

캔버스 위에는 반쯤 그려진 풍경화가 놓여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들판과 그 위에 피어난 들꽃들. 언젠가 수아와 함께 스케치했던 풍경이었다. 열여덟 살의 수아는 그림 속에서처럼 늘 생기 넘치고 빛났었다. 어린 날의 그 따뜻했던 기억들은 이제 희미해져 가는 꿈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라진 지 7년. 지우는 매년 봄이 올 때마다, 혹시 수아가 이 봄바람을 타고 어떤 소식이라도 전해오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곤 했다.

그녀의 손에서 붓이 스르르 미끄러져 떨어졌다. 쨍그랑, 하고 물감이 담긴 그릇과 부딪히며 소리가 났다. 그 순간, 탁자 위에 놓인 오래된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흐트러진 고요를 깨뜨렸다. 발신자 표시 없는 번호. 지우는 잠시 망설였다. 스팸 전화이거나, 혹은 또 다른 무의미한 정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우 씨 되시죠? 오래전에… 수아의 미술 선생님이었던 박미경입니다.”

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박미경 선생님. 수아가 사라지기 전, 가장 좋아했던 미술 선생님이었다. 그녀의 이름이 귓가에 닿자마자, 지우는 손끝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잊고 지냈던 이름이 던져준 충격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네,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지우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죠. 사실… 제가 얼마 전 작은 전시회에 갔다가, 수아와 비슷한 그림을 보게 됐습니다.”

그 말에 지우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그림. 수아의 그림. 그녀의 삶의 전부였던 그림. 그동안 수아를 찾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 했지만, 미술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었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확실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 속 특유의 색감과 터치, 그리고 무엇보다 화폭 가득 피어난… 잊혀진 들꽃들이 그랬어요. 수아가 즐겨 그렸던 바로 그 꽃들이었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섞여 있었다. 지우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7년 만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잊고 있던 희망의 불꽃이 터져 오르는 순간이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숨겨진 희망의 실마리

전화를 끊은 후에도 지우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손에 든 휴대전화는 아직도 따뜻했지만, 그 안에서 전해진 소식은 얼어붙었던 그녀의 세상에 따뜻한 햇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박미경 선생님은 전시회가 열렸던 작은 갤러리의 이름과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 작가가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갤러리 주인이 그 작가와 연락할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지우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처럼 흐트러진 머리를 묶고, 작업복 대신 외출복을 걸쳤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은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듯 강렬했다. 할머니가 걱정하실까 봐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섰다. 발걸음은 갤러리를 향했지만, 마음은 이미 저 먼 곳, 수아가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공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봄 풍경은 예전과 달랐다. 벚꽃은 단순히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 하나하나의 꽃잎이 수아가 남긴 흔적 같았고,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는 수아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7년의 시간 동안, 지우는 수아를 찾는 일을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망은 점점 바래졌고, 이제는 그저 매일매일을 견뎌내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 되어 있었다.

갤러리는 도시 외곽의 한적한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래된 벽돌 건물에 작은 간판만이 걸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따뜻한 조명 아래 여러 점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지우는 숨을 죽인 채 그림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풍경화, 정물화, 그리고 추상화들. 그녀의 눈은 수아의 그림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마침내 그녀의 시선이 한 작품에 멈췄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강렬한 색채와 섬세한 터치가 어우러진 그림이었다. 화폭 가득 펼쳐진 것은 다름 아닌, 수아가 즐겨 그렸던 바로 그 들꽃들이었다. 흔히 볼 수 없는, 야생의 풀밭에서 자라나는 작고 소박한 꽃들. 그 그림 속에는 수아 특유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강인하고, 동시에 한없는 그리움을 자아내는 그런 분위기였다.

지우는 그림 앞으로 다가섰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올린 방식, 빛과 그림자를 표현한 기법, 무엇 하나 수아의 그림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림 위를 조심스럽게 훑었다. 마치 수아의 손길을 더듬는 것 같았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녀는 애써 참아냈다. 이제 울 때가 아니었다. 이제는 행동할 때였다.

갤러리 주인에게 그림을 그린 작가에 대해 물었다. 중년의 여주인은 처음에는 조심스러워했지만, 지우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작가는 ‘봄날’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신비주의를 고수해서 직접 만난 적은 없고, 작품은 주로 택배로 보내옵니다. 연락도 메일로만 하고요.”

지우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또다시 막다른 길인가. 하지만 여주인은 덧붙였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직접 찾아와서 그림을 가져가기도 해요. 다음 주 금요일에 오기로 되어 있어요.”

그 말에 지우는 다시 희망을 품었다. 다음 주 금요일. 일주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여주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자신이 ‘봄날’ 작가의 언니이며, 동생을 오랫동안 찾아 헤매고 있다고. 여주인은 지우의 애절한 사연에 결국 마음을 열었다. 직접 만나게 해 줄 수는 없지만, 메시지를 전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갤러리를 나서는 지우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봄바람은 여전히 불어왔지만, 이제 그 바람은 더 이상 쓸쓸한 그리움을 싣고 오지 않았다. 대신, 희미하지만 확실한 희망의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수아. 살아있다면, 이 바람결에 언니가 너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다. 지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게 개인 하늘 위로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들이 마치 수아의 미소처럼 느껴졌다.

할머니의 눈물과 다짐

집으로 돌아오자 할머니는 작은 텃밭에서 고추 모종을 심고 계셨다. 지우는 할머니 옆에 조용히 앉아 방금 겪은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듣고 계시던 할머니는, 지우의 말이 끝나자 삽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꼭 잡으셨다.

“수아라니… 정말 수아일까?”

할머니의 눈가에 주름진 눈물이 고였다. 할머니는 수아가 사라진 후,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병석에 누우셨었다. 수아는 할머니에게 늘 웃음을 가져다주는 손녀였다. 지우는 할머니의 마른 손을 어루만졌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박미경 선생님이 분명하다고 하셨어요. 그 그림은 수아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고요.”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는 텃밭 한 켠에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저 꽃처럼, 우리 수아도 어딘가에서 꿋꿋하게 잘 자라고 있었을 게야. 이제라도 소식이 닿았다니, 얼마나 다행이니.”

지우는 할머니의 말씀에 목이 메었다. 7년 동안 쌓였던 불안과 슬픔, 그리고 죄책감이 한순간에 밀려왔다. 자신이 좀 더 수아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날 수아의 작은 투정을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수아는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할머니, 다음 주 금요일에 갤러리에 가서 그 작가를 기다릴 거예요. 꼭 수아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지우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지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축복해 주셨다. 봄바람이 다시 한번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차가운 회한이나 막연한 그리움이 아니었다. 분명한 희망과 새로운 시작의 기운을 품고 있는 바람이었다.

그날 밤, 지우는 수아가 사라진 후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꿈속에서 수아는 여전히 어릴 적 모습으로 들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수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곧, 따뜻한 바람이 그녀의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정말 수아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7년의 기다림 끝에 찾아온 이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지우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거대한 서막에 불과했다. 그녀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예감하며, 동이 트는 창밖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