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또 실패야?”
강민은 허공에 띄워진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마나 흐름이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에 닿는 순간, 마법진은 파르르 떨더니 이내 산산조각 흩어졌다. 연습용 홀을 가득 채웠던 마력의 잔향이 흩어지고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게 벌써 다섯 번째야….”
아르카나 마법 학원 입학 이후, 강민은 언제나 재능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명문 아르카나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능숙하게 다룬다는 중급 정령 소환 마법조차, 그에게는 마치 에베레스트와 같았다. 학년말 평가가 코앞인데, 이대로라면 낙제는 불 보듯 뻔했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기숙사로 돌아가거나, 삼삼오오 모여 던전 탐험을 떠났을 시간이었다. 늦은 밤, 홀로 텅 빈 연습실에 남아 마법 주문을 외우는 것은 이제 강민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의 손목에 찬 <에테르의 심장> 접속 단말기에서는 미약한 진동과 함께 남은 접속 시간이 스물네 시간 미만이라는 경고 메시지가 깜빡이고 있었다. 현실 세계의 피로도 누적을 막기 위한 시스템의 친절한(?) 배려였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이었다.
바닥 한켠에 흐릿하게 빛나는 문양 하나가 그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낡고 오래된 마법진이었다. 평소에는 그저 바닥의 장식인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유독 희미한 마나의 잔향을 풍기고 있었다. 마치 ‘여기 있다’고 속삭이는 듯.
“이건…?”
강민은 홀린 듯 손을 뻗어 마법진을 건드렸다. 낡은 문양이 그의 손끝에 닿자마자, ‘쉬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차가운 마력이 삽시간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법진 중앙에 작은 균열이 생겨났다. 검은 심연으로 이어지는 듯한 균열.
강민은 숨을 들이켰다. 분명 연습용 홀 바닥에는 이런 균열이 없었다. 혹시 버그인가? 하지만 현실감이 너무나 생생했다. 퀘스트 마커도 뜨지 않는, 순수한 우연의 발견. 그의 가슴속에 잊고 지냈던 모험심이 꿈틀거렸다.
“설마… 숨겨진 통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무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낙제 위기에 처한 강민의 마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만큼 절박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그는 작은 균열로 몸을 웅크려 밀어 넣었다.
몸이 검은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섬뜩한 감각.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발바닥에 차가운 바닥이 닿았다.
“크윽….”
강민은 휘청이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주변은 완벽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학원 복도를 비추던 마나등의 온화한 빛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등 뒤의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푸른빛만이 그가 서 있는 곳을 간신히 드러낼 뿐이었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곰팡이와 흙먼지,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였다.
“대체 어디지?”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자, 그가 들어온 균열은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갑작스러운 공포가 심장을 조여왔다.
*이런, 섣불리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튀었다. 강민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불꽃은 이내 주변의 마나를 흡수하며 작고 붉은 구슬 형태로 변하더니, 그의 머리 위를 맴돌며 주변을 밝혔다. <라이트 볼> 마법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붉은 마나등이 주변을 비추자, 강민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학원의 지하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기괴한 것이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좁은 통로였다. 벽은 거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표면에는 붉은색 이끼가 징그럽게 피어 있었다. 천장에서는 검은 액체가 마치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액체가 바닥에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 웅덩이에서는 알 수 없는 푸른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더욱 기괴한 것은 벽에 새겨진 문양들이었다. 그건 그 어떤 고대 마법학 서적에서도 본 적 없는, 뒤틀리고 왜곡된 형태로 이루어진 기묘한 상형문자들이었다. 마법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 여기는 대체….”
강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발걸음이 망설이는 사이, 벽면에 새겨진 문양 중 하나가 불현듯 빛을 발했다. 이내 문양 주위의 어둠 속에서 섬뜩한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 *어서 와… 너의 피를 환영한다…*
환청인가? 아니, 너무나도 생생했다. 강민은 본능적으로 이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호기심은 이미 이 이질적인 공간의 미스터리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붉은 라이트 볼에 의지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통로는 완만한 경사로 계속해서 아래로 이어졌다. 공기는 점점 더 차갑고 습해졌으며, 피 냄새는 더욱 진하게 풍겼다. 어디선가 ‘철컹, 철컹’ 하는 쇠사슬 소리와 함께 규칙적인 쿵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혹은 거대한 덩어리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의 끝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육중한 강철문은 붉은 이끼와 녹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표면에는 통로에서 본 것과 같은 뒤틀린 문양들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다. 문틈 사이로 붉은빛이 새어 나왔고, 쿵 소리는 더욱 거세게 울렸다.
강민은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렸다.
문 너머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모든 상식과 이성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다. 학원 전체를 통째로 삼킬 만한 규모의 동공 중앙에는, 거대한 크리스털이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붉게 박동하고 있었다. 그 크리스털은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 보였지만, 동시에 극심한 고통과 분노를 담고 있는 듯 일렁였다.
크리스털 주변으로는 수십 개의 강철 사슬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사슬은 거대한 크리스털을 억누르듯 단단히 조여 매고 있었는데, 그 끝은 동공 벽면에 박힌 기이한 주술진과 연결되어 있었다. 주술진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그 연기가 크리스털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크리스털 주위에 서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학원 교수들의 복장과 흡사한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었지만, 얼굴은 깊은 후드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뼈로 만든 듯한 지팡이를 든 채, 크리스털을 향해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수백 명이 동시에 속삭이는 것처럼 음산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마법사들이 아니었다. 강민은 직감했다. 그들의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아르카나 학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너무나도 음습하고 뒤틀린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은 생명을 갉아먹고, 영혼을 오염시키는 종류의 마력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거대한 크리스털이 격렬하게 진동하더니, 강렬한 붉은빛을 뿜어냈다. 빛은 동공 전체를 집어삼키는 듯했고, 동시에 모든 사슬이 ‘철컹!’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팽팽하게 당겨졌다.
크리스털의 빛이 최고조에 달하자, 그 안에서 형태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팔과 다리가 엉켜 있는 듯한 형상이었고, 셀 수 없는 눈동자가 동시에 번뜩이는 듯한 섬뜩한 기운을 내뿜었다.
— *가둬둘 수 없어… 절대로…*
강민의 뇌리를 강타하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 고통과 절규, 그리고 심연의 분노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것은 크리스털 안에 갇힌 존재의 것이었다.
순간, 한 로브를 두른 존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에 가려진 얼굴이 강민을 향하는 듯한 섬뜩한 느낌.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지만, 로브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어린 시선이 강민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누… 누구냐…!”
로브를 두른 존재의 손에서 검은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강민을 향해 맹렬히 뻗어왔다.
강민은 경악하며 몸을 돌렸다. 이 끔찍한 진실을 목격한 이상, 그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그는 숨겨진 통로가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잊고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지하 동공에는, 로브를 두른 존재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 아이를 놓치지 마라… 금기의 문을 연 죄를 묻게 될 것이다.*
강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의 심장은 마치 터질 듯이 울렸다. 아르카나 마법 학원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금기. 그는 지금, 그 비밀의 심장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