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하늘 아래, 세상은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했다. 아니, 침묵했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비명과 절규가 과거의 잔재로 남아 공기 중에 떠다니는 듯했다. 한때 높이 솟았던 마천루들은 뼈대만 앙상히 남아 검은 흉터처럼 대지에 박혀 있었고, 아스팔트 도로는 거미줄처럼 갈라져 온갖 잡동사니와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생기를 빨아먹은 듯한 황량함. 그것이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하준은 낡은 방독면 안에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들숨마다 필터 너머로 흙먼지 섞인 공기가 희미하게 정화되어 넘어왔지만, 그마저도 폐를 깎아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등에 맨 낡은 배낭은 어깨를 짓눌렀고, 한 손에 든 부서진 쇠파이프는 그의 유일한 무기이자 의지였다.

오늘도 수색이었다. 멸망의 날 이후, 사람들은 폐허가 된 도시를 ‘잿더미’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이든 찾아내야 했다. 식량, 물, 연료, 그리고 간혹 발견되는 오래된 기술의 잔해들. 그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젠장, 또 아무것도 없어.”

하준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방독면 안에서 먹먹하게 울렸다. 며칠째 제대로 된 것을 찾지 못했다. 버려진 편의점의 텅 빈 진열대, 무너진 아파트 단지의 썩어가는 가구들. 모든 것이 그저 절망만을 반복해서 보여줄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찢어진 방독면 렌즈 너머로 차갑게 빛났다. 그 안에는 피로와 함께 옅은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한때 병원이었을 법한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외벽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창문들은 모두 깨져 내부의 어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으스스한 기운이 풍겼지만, 이런 곳이야말로 예상치 못한 전리품을 찾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은 종종 가장 끔찍한 곳에서 싹트기 마련이었다.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발밑에서 깨진 유리 조각과 잔해들이 밟히는 소리가 사방의 정적을 깨뜨렸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어딘가 불쾌한 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천장에서 늘어진 전선들은 마치 죽은 나무뿌리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곳곳에는 검붉은 얼룩들이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있었다. 이 얼룩들이 무엇인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잿더미에선 불필요한 상상은 독이었다.

“하아…”

하준은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복도는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문들은 대부분 떨어져 나가거나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그의 쇠파이프는 언제라도 휘두를 수 있도록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이 잿더미에선 예측 불가능한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멸망의 날 이후, 세상의 생명체들은 기이하게 변이했다. 육식성으로 변해 인간을 공격하는 야수들, 혹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

그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건물을 가득 채웠다. 2층 복도 끝에 있는 수술실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창문이 깨진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었다. 저곳이라면 무언가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의약품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수술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삭막한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쇠파이프를 고쳐 잡고, 하준은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내부가 드러났다. 수술실은 난장판이었다. 뒤집힌 수술대, 널브러진 의료 기기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놓인 캐비닛이 눈에 띄었다. 금속 캐비닛은 절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액체가 몇 병 보였다.

“물…?”

하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순수하게 정제된 물이었다. 잿더미에서 가장 귀한 자원 중 하나. 그의 목은 바싹 말라 있었고, 가지고 있던 물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캐비닛으로 다가갔다.

한 병, 두 병, 조심스럽게 용기들을 꺼내 배낭에 넣었다. 총 세 병. 며칠은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물병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스치자 온몸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쉬이익-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소리.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하지만 훨씬 더 거칠고 비릿한 소음이었다. 하준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술실 구석, 그림자 속에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앙상한 팔다리는 기형적으로 길었고, 피부는 잿빛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찢어진 의료 가운 사이로 드러난 갈비뼈는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고, 얼굴은 짓이겨진 듯 일그러져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눈이었다. 시력을 잃은 듯 흐릿하고 탁한 눈동자는 하준을 향해 천천히, 하지만 집요하게 움직였다. 썩어가는 살덩이에서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변이체…’

하준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이 건물 안에 이런 게 숨어있을 줄이야. 보통은 소리를 내지 않고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부류였다. 어떻게 저놈이 이곳에 있었고, 왜 지금에서야 나타난 걸까? 아니,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변이체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하준에게 몸을 기울였다. 움직임은 느릿했지만, 그 안에 담긴 위협은 충분히 치명적이었다. 하준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쇠파이프를 단단히 잡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빌어먹을…”

변이체는 기괴한 자세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 순간, 하준은 수술실 구석에 놓인 녹슨 카트를 발로 차 날렸다.

쾅!

카트가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변이체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하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쩌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변이체의 갈비뼈에 쇠파이프가 박혔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하지만 변이체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받은 것에 반응하듯, 흐릿했던 눈동자에 붉은 섬광이 스쳤다. 이내 기형적인 손톱이 달린 팔을 휘둘러 하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쉬익- 콰직!

하준은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변이체의 손톱이 스친 방독면 렌즈에 깊은 흠집이 생겼다. 곧이어 방독면 필터에서도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돼!’

필터가 손상되면 외부의 오염된 공기가 그대로 들어왔다. 짧은 시간이라도 폐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하준은 방독면을 벗어 던졌다. 동시에 굳게 다물었던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을 내쉬었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는 필터로 걸러지지 않은, 잿더미의 오염된 공기였다. 쇠 비린내와 곰팡이 냄새가 더욱 강렬하게 폐부를 찔렀다.

변이체는 다시 공격해왔다. 이번에는 더 빠르고, 더 광적으로. 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피할 곳은 없었다. 도망쳐도, 이 오염된 공기 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죽을 수는 없어.’

그는 눈을 번뜩였다. 살기 위해선, 죽여야 했다. 쇠파이프를 양손으로 고쳐 잡고, 달려드는 변이체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들었다.

콰아앙!

쇠파이프가 변이체의 머리에 정확히 명중했다.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변이체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하준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또다시. 쇠파이프를 미친 듯이 휘둘러 변이체의 몸을 난타했다. 그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폐는 타들어 가는 듯했다.

몇 번의 강렬한 타격 끝에, 변이체는 마침내 바닥에 쓰러졌다. 축 늘어진 팔다리, 찢겨나간 살점들. 꿈틀거리던 몸은 이내 완전히 멈춰 섰다.

하준은 헐떡이며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다행히 쓰러진 변이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폐는 여전히 타는 듯 아팠고, 잿더미의 공기가 피부를 갉아먹는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술실 안은 온통 피와 살점의 파편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놈의 동족이 있을지도 몰랐고, 오염된 공기에 노출된 채로 더 오래 있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물병 세 개를 확인하고, 낡은 배낭을 고쳐 맸다. 손에 든 쇠파이프는 변이체의 피로 번들거렸다. 그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수술실을 나섰다. 잿빛 하늘 아래, 그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다음 생존을 위한 발걸음뿐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하준은 잠시 비틀거렸다. 오염된 공기는 그의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듯했다. 멀리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은 마치 이 세상의 피처럼 보였다.

그는 폐허가 된 도시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발걸음마다 희미하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의 목적지는 불분명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나아갈 뿐이었다.

밤이 오면 잿더미는 더욱 위험해질 터였다. 어딘가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걷는 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멸망의 날이 남긴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어쩌면 그 비명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존자들의 것이리라.

황량한 대지 위, 하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내일은 또 어떤 끔찍한 것을 마주하게 될까. 알 수 없었다. 단지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