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핏빛 안개, 녹색 빛
붉은 안개가 대기를 짓눌렀다. 하늘과 땅의 경계는 희미했고, 한때 거대한 빌딩 숲이었을 폐허의 첨탑들은 녹슨 거인의 뼈대처럼 핏빛 장막 너머로 겨우 그 윤곽을 드러냈다. 재하는 숨을 헐떡이며 무너진 고가도로 잔해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방진 마스크는 더 이상 붉은 먼지를 완전히 막아주지 못했고, 목 안쪽이 사포로 긁는 듯 칼칼했다. 며칠째 식수 한 모금 넘기지 못한 탓에 입술은 바싹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왔다.
그의 한 손에 들린 낡은 탐지기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잡음이 섞인 불규칙한 파장. 미약하지만 분명한 에너지 신호였다. 여태껏 이 광활한 폐허에서 탐지된 모든 신호는 예측 가능한 생체 반응이나 잔류 전파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신호는 달랐다. 생물도, 기계도 아닌, 기이하게 뒤섞인 형태. 그것은 재하를 이 죽음의 영역,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폐쇄 구역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발아래에서 부스러지는 콘크리트 조각들이 그의 움직임을 알렸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손에 든 쇠파이프를 단단히 쥐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황폐해진 자연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바로 살아남은 인간이었다.
붉은 안개가 잠시 옅어지는 틈을 타, 재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응시했다.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들이 마치 성벽처럼 쌓여 있는 작은 요새였다. 녹슨 철판들 틈새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 누군가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곳에? 아무도 살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이 죽음의 심연에?
심장이 불안하게 고동쳤다. 동시에 목마름과 허기가 잠시 잊혔다.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더욱 은밀하게 다가갔다. 컨테이너 벽에 난 작은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고, 임시변통으로 이어붙인 태양광 패널들 덕분인지 어둑하지만 그래도 형태를 분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놀랍게도 젊은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붉은 안개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듯 검고 윤기 있었고, 낡았지만 깨끗한 방진복을 입고 있었다.
여자는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그리고 그녀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바닥에서 섬뜩할 만큼 선명한 녹색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재하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 주변의 바닥에는 온통 낯선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깊은 바닷속 산호초처럼 가지각색의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붉은 안개와 대비되는 강렬한 초록, 푸른빛, 그리고 미약한 보랏빛까지. 이 황량한 세계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명들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미세하게 움직이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식물들로부터 아까 탐지기가 잡아낸 미지의 에너지 파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작은 칼로 그 식물들 중 하나에서 투명한 액체를 채취하고 있었다. 그 액체는 녹색으로 반짝이며 작은 유리병에 담겼다. 그 모습은 마치 정교한 의식을 치르는 듯 엄숙하고 진지했다. 그녀는 그 식물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외하는 듯했다.
재하는 혼란에 빠졌다. 이 식물들은 무엇인가? 독성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황폐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자원인가? 무엇보다, 이 여자는 누구이며 왜 이런 위험한 곳에서 이런 기이한 생명체를 기르고 있는 것인가?
그때였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재하가 숨어 있는 틈을 향했다.
재하는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들킨 건가?
아니, 그녀의 시선은 틈을 스쳐 지나, 재하의 등 뒤, 붉은 안개 속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공포와 함께, 경고의 빛이 스쳤다.
“누구….”
그녀의 입술이 겨우 소리를 냈을 때, 뒤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붉은 안개가 거세게 휘몰아쳤다. 강철과 콘크리트가 뒤틀리는 소리, 그리고 섬뜩하게 울려 퍼지는 짐승의 포효.
재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핏빛 장막 저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폐허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존재. 본능적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젠장!”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쇠파이프를 고쳐 쥐었다. 붉은 안개 속에서, 섬뜩한 녹색 빛을 내뿜는 정체불명의 식물들, 그리고 그 식물을 경배하듯 돌보던 미스터리한 여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지금 당장 눈앞의 위협이 가장 시급했다.
거대한 그림자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건물 잔해와 녹슨 철근이 뒤엉켜 마치 살아있는 괴수처럼 변형된 거대한 덩어리였다. 끔찍하게 튀어나온 쇠붙이들이 팔다리처럼 움직였고, 붉은 먼지로 뒤덮인 몸뚱이 곳곳에서 녹색으로 빛나는 식물들이 기생하듯 자라나고 있었다. 바로 여자가 채취하고 있던 그 식물들과 똑같은 것들이었다.
괴수는 폐허의 고통 그 자체처럼 보였다. 그 존재는 재하를 향해 천천히, 하지만 멈출 수 없는 기세로 다가왔다. 녹슨 철근으로 된 거대한 팔이 허공을 갈랐다.
재하는 이를 악물었다. 피할 곳도,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컨테이너 안의 여자를 돌아봤다. 그녀 역시 그 거대한 괴수의 출현에 얼어붙은 듯, 녹색으로 빛나는 식물들 사이에서 재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이전의 냉정한 경외심이 아니라, 절박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서, 그녀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그거… 건드리지 마요!”
그녀의 외침은 괴수의 포효에 묻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괴수? 아니면 괴수의 몸에 기생하는 빛나는 식물들?
재하는 괴수가 내리치는 강철 팔을 간신히 피하며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쿵! 엄청난 충격과 함께 땅이 진동했다. 폐허의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이 괴물의 정체를 알아내고, 저 여자가 기르는 식물들의 비밀을 파헤쳐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죽음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아 숨을 쉬어야 했다.
괴수가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붉은 안개 속에서 빛나는 녹색 눈이 재하를 집어삼킬 듯 응시했다. 재하는 쇠파이프를 거머쥔 채,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에도 똑같이 처절한 생존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이곳은 죽음의 폐허였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생명과 비밀이 숨 쉬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재하는 그 심연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