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아래 첫걸음**
낡은 서재는 먼지와 곰팡이, 그리고 잊혀진 지식의 꿉꿉한 냄새로 가득했다. 이현은 켜켜이 쌓인 고문헌들 사이에서 몸을 웅크린 채, 눈앞의 물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몇 달 전, 홀연히 종적을 감췄던 스승, 김 교수가 보낸 소포였다. 겉포장은 꽤 꼼꼼했지만, 내용물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낡은 가죽 일기장 한 권과 손안에 쏙 들어오는 검은 돌멩이 하나.
일기장은 해독 불가능한 암호와 알아볼 수 없는 기호들로 빼곡했다. 김 교수의 광기와 집착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필체였다. 이현은 며칠 밤낮을 새며 해독에 매달렸다. 커피잔이 수십 번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동안, 서재의 시계는 틱, 톡, 틱, 톡, 끊임없이 시간을 갉아먹었다. 마침내 마지막 암호가 풀렸을 때, 이현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
『…별들이 잊혀진 땅 아래, 시간이 잠든 곳… 그곳에 길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소에 대한 파편적인 묘사들. 지도도 좌표도 없이, 오직 고대 설화와 지질학적 특성, 그리고 김 교수의 개인적인 망상으로 뒤섞인 단서들만이 존재했다.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던 스승의 뒤를 따르려는 자신도 결국 미쳐가는 걸까. 그러나 이현의 심장은 묘한 흥분과 함께,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사로잡혔다. 학자로서의 순수한 호기심인가, 아니면 그저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을 향한 인간 본연의 맹목적인 탐욕인가.
그는 배낭을 쌌다. 물, 비상식량, 로프, 손전등, 그리고 오래된 호신용 칼 한 자루. 마지막으로 김 교수가 보낸 검은 돌멩이를 조심스럽게 넣었다. 돌멩이는 언제 만져도 차갑고, 매끄러웠으며,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기이한 감각을 전했다. 그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코웃음을 쳤다.
“이현, 또 그놈의 잊혀진 유적 타령이야? 이제 그만 좀 해. 김 교수는 그냥 미쳤고, 너도 따라서 그렇게 되고 싶어?”
“어디 헛고생 하지 말고, 우리랑 같이 논문이나 써. 그래야 학계에 다시 설 자리가 생기지.”
따뜻한 충고였지만, 그들의 걱정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조롱과 무시가 섞여 있었다. 이현은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혼자였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마지막에는 낡은 트럭을 얻어 타며 그는 문명의 끝자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한반도 내륙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지도에도 제대로 표기되지 않은 험준한 산맥이었다. ‘속삭이는 봉우리’라고 불리는 그곳은, 맑은 날에도 희뿌연 안개에 싸여있고, 기묘한 전설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발길을 끊은 지 오래된 곳.
트럭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비포장도로 끝에 도착하자, 이현은 홀로 짐을 짊어지고 길 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빽빽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낮인데도 어둑했고, 눅눅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풀벌레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짐승들의 울음소리만이 고요를 깨뜨렸다. 등산로도 없는 험한 길을 며칠간 헤쳐나가는 동안, 그의 몸은 피로에 절어갔지만, 정신은 오히려 더욱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 오기로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나흘째 되던 날 저녁, 그는 일기장에 묘사된 기이한 지형을 발견했다. 거대한 암벽이 마치 칼로 자른 듯 수직으로 솟아있었고, 그 사이에는 폭이 넓지 않은 깊은 협곡이 숨어있었다. 협곡 안은 이미 해가 져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현은 돌멩이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돌멩이에서 섬광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미세한 진동은 더욱 선명해졌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감촉은 흡사 살아있는 심장처럼 불규칙하게 고동쳤다.
“여기야…”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그의 것이었음에도 낯설게 느껴졌다. 이현은 협곡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발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기괴한 형상의 바위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고, 위를 올려다보니 하늘은 좁은 틈으로 겨우 보일 뿐이었다.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졌고, 습한 흙냄새 사이로 쇠 비린내와 알 수 없는, 그러나 지독히도 불쾌한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깊어질수록 협곡의 벽면은 더욱 매끄러워졌고, 자연적인 바위보다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깎아낸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협곡의 막다른 곳에 도달했을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벽면의 일부가 거대한 문처럼 보였다. 검고 매끄러운 암석으로 이루어진 그 문은, 아무런 이음새나 틈도 없이 벽과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문이라고 인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그 표면에 새겨진 문양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었다. 인간의 시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기하학적 형태의 혼돈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었다. 선들은 직선인 듯하다가 갑자기 휘어지고, 각도는 직각인 듯 보이다가 보는 각도에 따라 변형되는 착시를 일으켰다. 마치 3차원 공간에서 4차원의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형상처럼, 그의 뇌는 그 문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이현은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격렬하게 고동쳤다. 돌멩이가 그의 손에서 더욱 거칠게 진동했다. 그는 돌멩이를 문양에 가져다 댔다. 검은 돌멩이와 문양은 아무런 물리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김 교수가 말했던 ‘열쇠’라는 것을.
그는 떨리는 손으로 문양의 특정 부분을 어루만졌다. 김 교수의 일기장에 그려진,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기호. 돌멩이를 쥔 손이 그 기호 위에 닿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일렁였다. 무(無)에서 유(有)가 생성되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문양 전체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천천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벽과 하나였던 거대한 문이 마치 물결처럼 요동치더니, 안쪽으로 스르륵 밀려들어 가는 것이었다. 거대한 틈새가 벌어지며, 그 안에서 오랜 시간 갇혀 있던 미지(未知)의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곰팡이나 먼지 냄새와는 차원이 다른, 마치 우주의 차가운 정적을 응축해 놓은 듯한,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듯한 불쾌한 정적감.
이현은 손전등을 켰다. 좁고 깊은 통로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통로의 벽면은 검고 매끄러운 재질로 되어 있었고, 빛을 흡수하는 듯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 안에서 어떠한 생명체의 흔적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한 고요. 그러나 그 고요는 모든 것을 삼킬 듯한, 살아있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현은 한 발짝 내디뎠다. 어둠의 입구가 그를 집어삼킬 듯이 벌어져 있었다. 미지의 심연, 금지된 지식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천천히, 하지만 주저함 없이 그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뒤에서 소리 없이 닫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