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챕터: 고문서 속 심해어와 불청객
국립 고문서 보관소, 지하 3층. 에어컨조차 버거워하는 꿉꿉한 공기 속에서 강서하는 땀으로 축축한 손을 마른 티셔츠에 쓱 닦았다. 코끝을 스치는 곰팡이 냄새는 이제 향수만큼이나 익숙했다. 서하의 연구실이라고 쓰고 ‘자재 창고 겸 휴게실 옆 짜투리 공간’이라고 읽는 그곳은, 말 그대로 온갖 먼지 쌓인 고서와 지도, 깨진 토기 조각들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지난 5년간 ‘잊혀진 아테나이 지하 유적’의 존재를 증명하려 고군분투 중이었다.
아테나이. 전설 속 심해 도시. 대다수 학자는 신화 속 이야기로 치부했지만, 서하에게 그것은 뼈아픈 현실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쫓았던 환영, 그리고 학계에서 영원히 매장당하게 한 ‘환상’의 이름. 서하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그 유적을 찾아내야 했다.
“강 연구원님, 아직도 거기서 심해어랑 씨름 중이세요? 퇴근 안 하세요?”
경비 아저씨의 쉰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아직… 아직입니다!” 서하는 눈을 고문서에서 떼지 않은 채 소리쳤다. ‘심해어’는 아저씨가 서하의 연구를 비꼴 때 쓰는 애칭 아닌 애칭이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실존하지도 않는 심해 도시를 찾는 애’라는 뜻으로.
서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낡은 양피지 문서에는 빛바랜 그림과 함께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수십 년 전, 한 고고학자가 유럽의 작은 섬 마을에서 발견했다는 이 문서는, 아테나이 유적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단서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해독이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너무나 모호했고, 비유적 표현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시선이 한 구절에 멈췄다.
*‘밤이 삼킨 낮, 영원의 눈이 지켜보는 곳, 거대한 숨결이 잠든 심장의 문이 열리리라.’*
“영원의 눈… 거대한 숨결…” 서하는 중얼거렸다.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두근거렸다. 이런 식의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분명 다른 단서와 연결되는 고리가 있을 텐데.
그때였다. 창고 선반 제일 구석에 박혀 있던, 먼지투성이의 오래된 상자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눈에 들어왔다. 대충 보기에도 박물관 기증품 목록에서도 빠져있을 법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잡동사니 상자였다. 어쩐지 모르게 이끌린 서하는 손전등을 들고 상자 쪽으로 향했다.
“이런 건 왜 아직 안 버리고….”
뚜껑을 열자 퀴퀴한 냄새와 함께 바싹 마른 나뭇잎, 돌멩이 몇 개, 그리고 오래된 지도 조각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서하는 실망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역시 별것 아니군. 그때, 나뭇잎 더미 아래에서 무언가 번쩍였다. 서하가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올려진 것은 낡았지만 섬세하게 세공된 청동 나침반이었다. 일반적인 나침반과는 달리 바늘 대신 태양 문양과 달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방향을 가리키는 대신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침반 한쪽 모서리에 그녀가 방금 전 고문서에서 읽었던 ‘영원의 눈’과 똑같은 문양이 희미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단순한 우연일 리 없었다. 이 나침반은 고문서의 수수께끼를 풀 열쇠였다! 서하는 흥분으로 떨리는 손으로 나침반을 뒤집었다. 그 순간, 상자 옆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좀 길을 헤매서….”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가 균형을 잃고 서하가 기댔던 선반에 그대로 부딪혔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상자들은 무너져 내렸고, 서하는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손에 들고 있던 나침반은 그만 손아귀에서 벗어나 데구르르 굴러갔다.
“악!”
서하의 비명과 동시에 남자의 “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넘어진 상자 더미에 발이 걸려 그대로 나자빠진 모양이었다. 서하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떴다. 이 상황에 나타나 모든 걸 망쳐놓은 이 민폐 덩어리는 대체…!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은데… 혹시 제가 엄청 중요한 걸 망가뜨린 건 아니겠죠?”
정리되지 않은 갈색 머리에, 대충 걸친 듯한 리넨 셔츠, 그리고 반쯤 풀린 단추 사이로 보이는 단단한 가슴 근육까지. 남자는 얼굴은 꽤 잘생긴 편이었지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어딘가 어설펐다. 나이는 서하와 비슷해 보이거나 조금 더 많아 보였다. 손에는 낡은 가죽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서하는 차마 말문이 막혀 그를 노려봤다. “당신… 당신은 누구세요? 그리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아, 저요? 저는 최현우입니다. 이 최현우가 누군고 하니, 고대 문명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읍!”
서하는 그의 손에 들려있던 가방을 뺏어 들고 그가 주워 들려던 나침반을 재빨리 가로챘다. “헛소리 그만하고! 당신, 이 밤중에 여기 왜 온 거예요?”
최현우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전 그저 박물관장님 부탁으로 희귀 고문서 해독 의뢰 때문에 잠깐….” 그는 서하의 손에 들린 나침반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그런데 그거… 설마 ‘영원의 눈’ 문양 나침반이에요?”
서하의 심장이 다시 한번 철렁 내려앉았다. 이 남자가 이걸 어떻게 알아?
“당신, 그걸 어떻게…?”
최현우는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이제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넘치던 미소 대신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테나이의 심장’ 나침반이죠. 태양과 달이 교차하는 곳, 시간의 문이 열리는 방향을 가리킨다는… 전설 속의 유물. 그런데 강 연구원님, 그걸 어떻게 여기에?”
‘아테나이의 심장’이라니. 서하가 평생을 찾아 헤맨 고대 유적의 핵심 단어였다. 이 남자, 최현우는 이 나침반에 대해, 그리고 심지어 아테나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쪽이야말로 이 밤중에 여기서 뭘 하는 거죠? 그리고 박물관 고문서에 관심이 있다면 정식 절차를 밟았어야죠! 무단 침입 아니에요?” 서하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최현우는 싱긋 웃었다. “아, 물론 정식 절차를 밟았죠! 다만 제가 좀 특이한 시간대에 일하는 편이라서요. 그리고… 강 연구원님, 혹시 ‘아테나이 지하 유적’에 대해 연구하고 계신가요?”
직설적인 질문에 서하는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한 척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중요한 건 당신이 제 물건을 망가뜨릴 뻔했고, 지금 제 연구실에 무단으로 들어왔다는 거예요.”
“아니죠, 강 연구원님.” 최현우는 성큼성큼 다가와 서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장난스러웠지만, 그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통찰력이 느껴졌다. “중요한 건, 강 연구원님이 드디어 찾았다는 겁니다. 제가 수년간 찾아 헤매던 그 ‘아테나이로 가는 길’의 첫 번째 조각을요.”
서하는 숨을 들이켰다. 이 남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예요!”
“제가 며칠 전, 고대 지도 조각 하나를 입수했는데 말이죠. 그 지도에는 강 연구원님의 고문서에 적힌 ‘밤이 삼킨 낮’과 ‘거대한 숨결’이라는 표현이 그림 문자로 함께 있었어요.” 최현우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낡은 양피지 조각을 꺼내 서하의 눈앞에 흔들었다. “그리고 그 지도에 딱 하나 빠진 게 있었죠. 바로 이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알려줄 ‘영원의 눈’ 문양.”
서하의 눈이 지도의 그림 문자를 스캔했다. 그녀의 고문서와 정확히 일치하는 표현이었다.
최현우는 빙긋 웃었다. “어때요, 강 연구원님? 우리, 제법 잘 맞지 않나요? 하나는 지도를, 하나는 나침반을. 그리고 또 하나는 해독 열쇠를.” 그는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바로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 말입니다.”
서하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능글맞은 남자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왜 지금 이 순간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일까?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쳤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던 그 ‘환상의 도시’ 아테나이가, 이제 현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열려는 순간, 이 불청객이 문고리를 함께 잡고 있었다.
“강 연구원님. 이제 ‘심해어’는 심해 깊은 곳에서 육지로 올라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두컴컴한 지하 창고에서만 빛을 보던 아테나이가, 이제 세상의 빛을 볼 차례입니다.” 최현우는 싱긋 웃으며 나침반을 든 서하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의 손길은 예상치 못하게 뜨거웠다. “우리, 같이 갈까요? 잊혀진 심해 도시로의 여정, 혼자 가기엔 좀 아깝잖아요?”
서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남자의 말대로, 이제 그녀의 오랜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의 시작에, 그녀의 모든 예측을 벗어난 최악의(어쩌면 최고의?) 동반자가 서 있었다. 조용하고 먼지투성이던 그녀의 삶에, 시끄럽고 예측 불가능한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로맨틱 코미디인지, 아니면 생존 스릴러인지 알 수 없는 모험의 서막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