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틈새에서 부는 바람
지우는 눈을 떴다. 쨍한 햇살이 창밖을 비집고 들어와 방 한구석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침대 머리맡 작은 협탁 위에 놓인 알람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7시 15분. 알람은 분명 7시에 맞춰두었는데, 왜 울리지 않았지? 어제 깜빡했나?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발치에 벗어둔 어제 입었던 티셔츠가 바닥에 가지런히 접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젯밤 분명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잠들었을 텐데.
“뭐지, 내가 치웠던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 자신의 부스스한 머리를 확인하고 칫솔을 들었다. 칫솔 꽂이에 꽂힌 칫솔이…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색깔의 칫솔이 맨 앞에 꽂혀 있었다. 낡은 파란색 칫솔. 지우의 칫솔은 흰색이었다. 설마 현수가 놓고 간 건가? 하지만 현수는 이 집에 온 지 몇 달은 되었고, 올 때마다 자기 칫솔을 챙겨 왔다.
“이건 또 언제 놓였지?”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곧 어젯밤 과음 탓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보다.
부엌으로 향했다.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내릴 생각이었다. 커피 머신 앞에 놓인 컵을 잡으려는데, 컵이 손에 닿기도 전에 스르륵 미끄러져 테이블 가장자리로 향했다. 지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컵을 붙잡았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깨질 뻔했다.
“젠장.”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손이 작게 떨렸다. 컵 바닥에 물기가 있었나? 아니, 분명 말라 있었는데. 그 순간 냉장고 문이 ‘끼이익’ 하고 스스로 열렸다. 그리고는 다시 ‘쿵’ 하고 닫혔다.
지우는 얼어붙었다. 낡은 집이라 가끔 문이 덜컹거리는 일은 있었지만, 이렇게 스스로 열리고 닫힌 적은 없었다. 게다가 방금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 문을 확 열었다가 힘껏 닫은 것 같았다.
“현수, 너야? 장난치지 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집 안에는 고요만이 감돌았다. 숨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오싹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랐다.
“별 미친… 내가 드디어 미쳤나?”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분명 피곤해서, 아니면 스트레스 때문에 환각을 보고 있는 거라고. 그래, 그렇게 믿어야 했다.
—
점심시간. 지우는 평소처럼 현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우]: 야 나 오늘 아침부터 좀 이상한 일 겪음
[현수]: 또 뭔데? 어제 술 너무 마셨냐?
[지우]: 아냐 진짜 이상해. 컵이 혼자 움직이고 냉장고 문도 열렸다 닫혔어.
[현수]: ㅋㅋㅋㅋㅋ 야 그거 귀신 아님? 네가 드디어 폐가에서 사는 티를 내는구나.
[지우]: 야 진지해. 나 진짜 소름 돋았다고.
[현수]: 너무 피곤한 거 아님? 아니면 이사 갈 때 됐나 보네. 집값 올랐을 때 팔아.
[지우]: 하… 됐다.
[현수]: 심심하면 와서 재워줄게. 귀신 무서우면 말하고. 농담이야ㅋㅋㅋ 힘내라.
현수의 가벼운 반응에 지우는 더욱 고립감을 느꼈다. 그래, 누가 이런 말을 믿어주겠어.
—
오후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을 작은 소음 하나하나에도 온몸이 경직됐다.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하려는데, 모니터가 갑자기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다시 켜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화면이 들어왔다.
“이것도 노후화 탓이겠지…”
하지만 지우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밖이 어둑어둑해지고, 가로등 불빛이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기 시작하자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덜컥!
갑자기 현관문이 크게 흔들렸다. 지우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대답이 없었다. 인기척도, 발소리도. 지우는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다가갔다. 도어락을 확인했다. 잠겨 있었다. 분명 잠겨 있는데, 방금 그 흔들림은 대체 뭐였지?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손잡이가 차갑게 느껴졌다. 쇠로 된 손잡이였지만, 한겨울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치 누군가 방금까지 잡고 있었던 것처럼.
그때, 거실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실장 위, 오래된 액자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지우의 어린 시절 사진이 담긴 액자였다. 그 액자는 늘 거실장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고, 꽤나 무거워서 혼자서 떨어질 리 없었다. 마치 누군가 잡아채서 던진 것처럼.
“이… 이게 뭐야…”
손발이 덜덜 떨렸다. 더 이상 합리화할 수 없었다. 이건 꿈도, 환각도, 노후화도 아니었다.
그때였다. 거실에 흩어진 액자 파편들을 응시하던 지우의 시야가 갑자기 일렁였다. 마치 뜨거운 공기 위로 사물이 일렁이듯, 시야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아파트 벽지가 순식간에 누렇게 바래고, 창틀은 칠이 벗겨진 나무 창문으로 변했다. 거실장 위에는 낡은 자개장이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는 검은색 다이얼 전화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익숙한 현대식 가구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희미하게 빛나는 듯한 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희고 얇은 한복을 입고 있었다. 여인은 액자가 떨어진 자리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우는 숨도 쉴 수 없었다. 그 풍경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마치 과거의 한 조각이 현재의 공간을 찢고 들어온 것만 같았다.
“누… 누구세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하지만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없이 바닥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일그러졌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누렇게 바랬던 벽은 깨끗한 흰색으로, 낡은 창틀은 현대식 샷시로. 자개장과 다이얼 전화기는 사라지고, 익숙한 거실장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닥에는 여전히 산산조각 난 액자 파편들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지우는 알고 있었다. 방금 본 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짧고 섬뜩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공간이, 무언가에 의해 침범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의 틈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일상을 찢어발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
지우는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건 폴터가이스트 현상 같은 단순한 영적인 장난이 아니었다. 분명 더 복잡하고, 더 위험한 무언가가 이 아파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할까? 경찰? 정신병원? 현수?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그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어둠이 짙어지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지우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의 일상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