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3화: 찢어진 장막
차가운 바람이 금지된 숲의 앙상한 가지들을 흔들었다. 밤은 달빛 한 조각 허락하지 않은 채, 먹물을 풀어놓은 듯 깊었다. 청운문 수련복 소매를 걷어붙인 이진우의 손끝은 이미 얼얼했지만, 그의 심장은 마치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는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숲의 정적 속으로 녹아들었다.
귓가에 맴도는 건 청운문 사형들의 굳건한 목소리뿐이었다.
“마영족의 준동이 심해지고 있다. 놈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사악한 존재들. 우리는 더 강력한 응징으로 맞서야 한다.”
‘사악한 존재들’… 그 단어가 마치 칼날처럼 그의 가슴을 찢었다.
오랜 침묵 끝에 다다른 잊혀진 신전의 폐허. 덩굴에 뒤덮인 돌기둥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이진우는 숨을 죽인 채 다가섰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그의 세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존재를 발견했다.
유라였다.
그녀는 늘 그렇듯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으나, 오늘 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영족 특유의 흑요석 같은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창백한 뺨 위로 핏방울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익숙한 킬리언의 모습이 보였다. 유라의 충직한 호위 무사. 하지만 지금 킬리언은 축 늘어진 채 돌기둥에 기대어 있었고, 그의 옆구리에는 인간의 영력이 남긴 듯한 불길한 붉은 상처가 선명했다.
이진우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유라!”
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유라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이진우를 바라봤다. 슬픔과 경계심이 뒤섞인 깊은 눈빛.
“진우… 당신이 올 줄 알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이진우는 곧장 달려가 킬리언의 상태를 살폈다. 치명적이었다. 영기가 온몸을 휘저으며 장기를 파괴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청운문 순찰대가 여기까지 침범했나?” 이진우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렸다.
유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경계선을 넘어간 우리 부족원들을 추격하던 중이었어요. 킬리언은… 동료들을 구하려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인간들은… 끝없이 우리를 몰아붙이고 있어요.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아요.”
이진우는 무릎을 꿇고 킬리언의 상처를 들여다봤다. 그의 손에서 푸른 영력이 피어올라 킬리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응급 처치에 불과했지만, 통증이라도 덜어주려 애썼다. 킬리언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희미하게 눈을 떴다. 이진우를 알아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진우 님… 공주님을… 지켜주십시오…”
힘없는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유라는 이진우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손이 이진우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가웠다.
“당신은… 대체 왜 이곳에 온 거죠? 내가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인간 수련자들이 당신을 ‘배신자’라 부를 걸 알면서도…”
“배신자라 불러도 상관없어.” 이진우는 유라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위험한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이 전쟁이… 우리를 어디까지 몰아붙일 셈인지 모르겠어.”
그때였다. 숲 저편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동물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훈련된 군대의 발소리. 그리고 영력을 담은 움직임이었다.
이진우의 표정이 굳었다. “청운문 순찰대다.”
유라의 눈빛에 공포가 스쳤다. “벌써 여기까지?”
“놈들이 킬리언의 흔적을 쫓아온 거야.” 이진우는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잊혀진 신전의 폐허는 숨기에는 너무 개방적이었다. “어서! 저 안쪽, 무너진 본당의 제단 뒤로 숨어야 해!”
유라는 망설임 없이 킬리언을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킬리언은 이미 의식을 잃은 채 무거웠다.
“제가 들겠습니다!” 이진우는 킬리언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고통에 찬 신음이 킬리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유라는 그의 팔을 붙잡고 무너진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 거대한 석상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제는 대화 소리까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 근처에서 마영족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놓치지 마라!”
청운문의 장로, 홍염의 목소리였다. 이진우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홍염 장로는 마영족에 대한 증오가 깊기로 유명했다. 그에게 잡히면, 유라는 물론이고 이진우 자신도 살아남기 어려울 터였다.
이진우는 숨을 죽이고, 자신의 모든 영력을 끌어모아 주위를 은폐했다. 마영족의 기운과 인간의 기운이 뒤섞여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되지 않도록, 자신의 영력으로 이 세 존재를 감쌌다. 마치 숲의 일부인 것처럼, 그저 낡은 돌무더기인 것처럼.
발소리가 신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쿵, 쿵. 발걸음이 돌바닥을 울렸다.
“이곳인가? 마영족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는데…” 홍염 장로의 목소리가 코앞에서 울렸다.
이진우는 유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깊은 심연 같았다. 두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강인함 뒤에, 감출 수 없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
발걸음이 그들이 숨어 있는 제단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찰칵. 누군가 검을 뽑는 소리.
“이 뒤에는 무엇이 있느냐?” 홍염 장로의 차가운 질문.
이진우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들킬 것이 분명했다. 순간, 그는 유라의 손을 꽉 잡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겠다는 듯이.
“오랜 폐허입니다. 마영족이 숨을 만한 곳은 아닌 듯합니다.” 한 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확인해라. 작은 쥐새끼 한 마리라도 놓치지 마라.”
그리고 발소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진우가 있는 곳은 오지 않았다. 그들은 제단 주변을 훑더니, 신전의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발소리는 천천히 멀어져 갔고, 이윽고 숲 속으로 사라졌다.
이진우는 그제야 억눌렀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유라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이진우가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유라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이번에는 깊은 결심 같은 것이 읽혔다.
“진우…”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떨려서, 이진우는 그녀의 얼굴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우리 부족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요. 당신들이 ‘정화’라 부르는 그 학살 속에서… 우리는 죽어가고 있어요.”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손을 잡는 힘을 더할 뿐이었다.
“우리 부족의 마지막 희망이… 이제 당신에게 달렸을지도 몰라요.”
이진우는 고개를 들었다. 유라의 눈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간절함과 필사적인 애원이 담긴 눈빛이었다.
“무슨 말이야, 유라? 내가 뭘…”
“우리의 마지막 비술이…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해요. 깨어나기 위해서는…” 그녀는 이진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진우.”
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마지막 비술. 인간의 피.
그녀의 말은, 그들의 금지된 사랑을 더욱 깊고 위험한 절벽 끝으로 몰아세우는 절규 같았다.
이진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순간, 그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차디찬 불안감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는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