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하늘 아래, 녹슨 철골들이 앙상한 유령처럼 솟아 있었다. 잿빛 대기가 도시를 덮었고, 그 아래로 무너진 건물들은 마치 거인들의 무덤 같았다. 진우는 허물어진 고가도로 잔해 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의 등 뒤에는 낡은 배낭이 축 늘어져 있었고, 손에 든 개량형 스캐너는 웅웅거리는 작은 소리만을 낼 뿐이었다. 며칠째 식량도, 에너지 셀도 변변히 찾지 못했다. 사막처럼 메마른 그의 목구멍은 침을 삼킬 때마다 쓰라렸다.
“젠장… 이쪽도 꽝인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스캐너 화면에 뜨는 것은 지독한 노이즈와 희미한 방사능 수치뿐. 어제까지만 해도 이 구역 어딘가에 오래된 비상 발전소 터가 남아있다는 정보를 얻었지만, 이제 와서는 그저 헛소문이었나 싶었다. 폐허의 바람은 윙윙거리며 진우의 낡은 방한복 깃을 흔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절망과 무기력함의 풍경이었다.
그때였다. 쿵! 저 멀리서 둔탁한 진동이 땅을 울렸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경험상 이런 진동은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하나는 놈들의 움직임, 다른 하나는 낡은 건물의 연쇄 붕괴.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은 신호였다.
진동은 계속 이어졌다. 주변의 건물 잔해들이 자잘한 먼지를 쏟아내며 흔들렸다. 진우는 가까운 기둥 뒤로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너져 내린 고층 빌딩의 거대한 잔해였다. 저 정도 규모라면… 진동의 원인은 분명 빌딩 붕괴였다. 그런데 방향이 이상했다. 자신이 목표로 삼았던 비상 발전소 터 쪽이 아니라, 그보다 더 안쪽, 지도에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던 구역이었다.
고민할 틈도 없이, 붕괴는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진우가 서 있던 고가도로 잔해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험했다. 버티다간 함께 추락할 것이 분명했다.
“젠장, 이럴 땐 도망이 상책이지!”
그는 주저 없이 방향을 틀었다. 무너져 내리는 잔해를 피해 폐허 속으로 내달렸다. 익숙지 않은 좁은 골목들을 헤치고, 녹슨 철문을 박차고 나아갔다. 간신히 고가도로 잔해의 붕괴 범위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느 건물의 지하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오래된 도서관이었던 모양이었다. 입구 간판은 반쯤 부서져 있었지만, ‘지혜의 전당’이라는 글자 몇몇은 희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그래도 지상보다는 안전할 터였다. 진우는 한숨 돌릴 겸,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지하로 내려섰다.
내부는 예상외로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멀쩡했다.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천장이 무너지거나 벽이 갈라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긴 복도를 따라 책장이 늘어서 있었고, 썩은 종이 냄새 대신 묘하게 상쾌한 흙냄새 같은 것이 풍겼다. 스캐너를 켜자, 희미하게 방사능 수치가 안정적이라는 신호가 떴다.
“이런 곳이 남아있었다니…”
진우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책장 사이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자, 복도 끝에 굳게 닫힌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녹슬지 않은, 마치 최근에 보수한 듯한 말끔한 철문이었다. 스캐너는 철문에서 아주 약한 에너지 파동을 감지했다. 일반적인 기계적인 파동과는 달랐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진우는 철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아보려 했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그는 문틈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문 옆에 새겨진 정체불명의 문양에 시선이 닿았다. 복잡하게 얽힌 선들과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양을 따라 그렸다. 순간, 철문에서 차가운 기운이 확 풍겨 나왔다. 진우는 깜짝 놀라 손을 떼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이 문양에 닿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짜릿한 전류가 흘러들었다. 동시에 눈앞에 환영처럼 빛나는 글자들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고대 문자였다.
“이게… 뭐야?”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환영은 그의 머릿속으로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했다. 그는 읽을 수 없는 문자를 바라보며, 마치 내용을 이해하는 것처럼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망각된 힘의 계승자여.’*
환영과 목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철문이 ‘스으윽’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렸다. 안에서는 맹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진우는 팔로 눈을 가렸지만, 그 빛은 마치 그의 시신경을 직접 자극하는 듯했다.
빛이 걷히자, 진우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낡은 도서관의 지하가 아니었다. 거대한 돔형 공간, 천장에는 수없이 많은 발광하는 광석들이 박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연출하고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는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진 돌판이 놓여 있었다.
돌판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희미했지만, 진우의 온몸의 세포를 깨우는 듯한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치 홀린 듯 제단으로 다가갔다. 돌판에 손을 뻗자, 아까 철문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강렬한 에너지 파동이 그의 손을 감쌌다.
*쿵!*
머릿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의 주변 공간이 일렁였다. 눈앞의 돌판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갑자기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그는 눈을 감았다. 온몸의 혈액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 같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은 전과는 달랐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돌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파동이 선명한 빛의 흐름으로 보였다. 공간을 떠다니는 아주 작은 마나 입자들, 혹은 알 수 없는 형태의 힘의 조각들이 시야에 잡혔다.
그리고 그의 손.
자신의 손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손바닥을 펼치자, 빛은 더욱 강렬해지며 그의 손 위에서 작은 불꽃처럼 아른거렸다. 그것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저 순수한 형태의 에너지였다.
“이… 이건…”
진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경외와 혼란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마법이라니? 그것도 고대 유적에서 발견된, 이런 압도적인 힘이라니?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하 도서관의 입구에서부터 무언가 거대한 것이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진동은 진우가 처음 건물 붕괴를 느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괴물이었다. 어쩌면 그 에너지의 폭발에 이끌려 온 것일지도 모른다.
진우는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돔형 공간의 유일한 입구, 그곳에서 어둠을 뚫고 거대한 짐승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녹슨 금속 조각과 살점이 뒤섞인 듯한 흉측한 외형, 붉게 빛나는 두 눈동자.
그는 무심코, 방금 자신이 얻은 힘을 떠올렸다. 손바닥에서 푸른 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절박한 생존 본능이 그를 지배했다.
“…설마, 이걸 써볼 때가 된 건가.”
진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더 이상 공포에 질린 생존자의 눈이 아니었다. 혼란 속에서도, 어딘가 강렬한 생기와 결의가 깃든, 새로운 힘을 품은 자의 눈빛이었다. 이 고대의 힘이 그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의 지루하고 절망적인 생존은, 이제 막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