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검은 그림자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수천 년간 평화로이 이어져 오던 강호는 알 수 없는 어둠의 기운에 의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균열은 마침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번져 나갔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떨었고, 각 문파의 고수들은 이 알 수 없는 재앙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멸마(滅魔)의 기운, 혹은 세상의 근원을 뒤흔드는 거대한 공허함이라고 불리던 그것은, 모든 생명을 말려 죽이고 대지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천하의 모든 무림맹과 정파, 사파, 심지어는 은거하던 기인들까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최후의 보루이자 유일한 희망, 바로 ‘천하무도제’였다.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세상의 기운이 모인다는 천운 고원. 그곳에 거대한 비무장이 세워졌고, 대회의 막이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천운 고원으로 향하는 험준한 산길. 고요한 밤하늘 아래, 한 사내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검은 천으로 감싼 장검이 매달려 있었고, 얼굴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미동도 없었다. 류청운. 강호에서는 ‘무영검’이라 불리는 자였다. 그는 어떤 문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세상의 명예나 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만의 검을 수련하고, 마음속의 평화를 추구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발걸음은 멈출 수 없는 거대한 흐름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까지 오는 것이 옳은 길이었을까.’
류청운은 차갑게 빛나는 달빛 아래 굳은 표정을 지었다. 어둠의 기운이 천하를 뒤덮기 시작했을 때, 그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예감은 며칠 밤낮을 괴롭혔고, 결국 그를 움직이게 했다. 무림대회에 참여해달라는 무림맹주의 간곡한 요청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지만, 그는 매번 거절했었다. 자신 같은 일개 검객이 천하의 운명을 논하는 자리에 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온 세상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소리였다.
새벽녘, 마침내 천운 고원의 입구에 당도했다. 깎아지른 듯 솟아오른 거대한 암벽들이 좌우를 에워싸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끝없이 펼쳐진 듯한 드넓은 고원이 보였다. 이미 수많은 인파가 고원 입구를 메우고 있었다. 정파의 명문 대종사들부터 사파의 기괴한 복색을 한 무인들, 그리고 이름 모를 은거 고수들까지, 천하의 모든 무림인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물결처럼 고원 안쪽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결의, 그리고 희미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고원 중앙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비무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십만 명의 관객을 수용하고도 남을 법한 웅장한 규모였다. 비무장의 바닥은 굳건한 청강석으로 깔려 있었고, 그 위로는 수십 길 높이의 결계가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드리워져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천하의 운명이 결정될 성지였다.
류청운은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려 경기장 안쪽으로 들어섰다. 수많은 시선이 그를 향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문득, 한쪽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거친 인상의 사내가 거대한 창을 든 채 서 있었다. ‘철혈창마’ 황보 진이었다. 한때는 강호를 피로 물들였던 사파의 거두였으나, 어둠의 그림자 앞에서는 그 역시 한 명의 무인에 불과했다.
다른 편에서는 백의를 입은 여인이 차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그 속에 담긴 내공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빙옥선녀’ 설영. 정파의 명문, 백화문의 차기 문주였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비무장 중앙에 마련된 높은 단상 위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몸은 작고 왜소했으나,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하늘을 찌를 듯 웅장했다. 그는 무림맹의 최고 원로이자 천하의 현자라 불리는, ‘태원 현자’ 진무상인이었다.
진무상인의 등장에 웅성거리던 모든 인파가 일순간 침묵했다. 그는 천천히 단상 중앙으로 걸어가, 모든 무림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세월의 깊이를 담고 있었고, 그 속에는 비통함과 함께 굳건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천하의 무인들이여.”
진무상인의 목소리가 고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지금 우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심연의 어둠’이 깨어났고, 그 끝없는 탐욕으로 이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낮은 탄식과 술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수없이 노력했다. 모든 문파가 힘을 합쳐 막아보고자 했으나, 심연의 어둠은 너무나도 강대했다. 이대로는, 천하의 모든 생명이 사멸할 것이다. 대륙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폐허가 될 것이다.”
진무상인의 목소리에는 비통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 이 무도제의 최종 우승자는, 모든 무림인의 염원을 담아 ‘천지심인(天地心印)’을 계승할 것이다. 천지심인은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비보로, 심연의 어둠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을 지니고 있다.”
좌중은 더욱 큰 술렁거림에 휩싸였다. 천지심인이라니! 전설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여겨지던 보물이었다.
“천지심인은 오직 순수한 무의 경지에 도달한 자만이 그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천하무도제를 통해 단 한 명의 운명의 수호자를 가려낼 것이다. 이 무도제는 단순한 비무가 아니다. 이는 천하의 명운을 건, 최후의 결전이다!”
진무상인의 외침은 고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모든 무인들의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열기와 함께 막중한 책임감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류청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진무상인의 연설을 들었다. 천지심인. 그는 그 이름이 익숙했다. 어릴 적, 스승님께서 들려주시던 옛이야기 속에서 들었던. 세상의 모든 기운을 담고 있으며, 오직 ‘진정한 무인’만이 다룰 수 있다는 보물.
그는 자신의 검을 만졌다. 천지심인의 힘이 어떠하든, 그에게는 오직 검만이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검으로, 이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이곳에 왔다. 명예도, 권력도 아닌, 오직 순수한 무의 길을 걷기 위해서.
‘스승님… 제가 올바른 길을 택한 것일까요.’
문득, 돌아가신 스승의 희미한 얼굴이 떠올랐다. 스승은 언제나 말씀하셨다. “청운아, 검은 곧 마음이다.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어떤 어둠도 너를 삼키지 못할 것이다.”
진무상인의 연설이 끝나자, 비무장 곳곳에 설치된 거대한 북들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천지를 뒤흔드는 웅장한 소리였다. 이윽고 단상 아래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첫 번째 대진을 알리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천하무도제, 첫 번째 비무를 시작한다! 서쪽 비무대, ‘철혈창마’ 황보 진과 ‘섬광검’ 맹 사강!”
이름이 호명되자, 비무장은 일순간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황보 진은 거친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거대한 창을 어깨에 메고 서쪽 비무대로 향했다. 맞서는 맹 사강 또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류청운은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최후의 결전. 그는 조용히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그의 검 또한, 이제 곧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시험대에 오를 차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