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장막이 찢겨나간 듯 검붉은 기운이 대지를 휘감았다. 한때 태양의 축복을 받던 왕궁의 첨탑은 이제 잿빛 구름에 가려 스산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아래 펼쳐진 도시에는 비명 대신 침묵만이 감돌았다. 카이렌은 찢어진 망토 자락을 움켜쥐고 피 묻은 검을 든 채, 폐허가 된 제단 앞에 섰다. 이곳은 한때 그의 것이었다. 그의 백성, 그의 희망, 그의 모든 것이었다.
“벨레로폰… 네 놈이….”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과도 같았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분노가 그의 심장을 찢어 발기는 듯했다. 카이렌의 눈동자는 더 이상 푸른빛을 띠지 않았다. 심연의 어둠을 닮은 검은 불꽃이 그의 눈 속에서 춤을 추었다.
두 달 전.
그날은 모든 것이 완벽한 듯했다. 오랜 전쟁 끝에 평화가 찾아왔고, 카이렌은 ‘별의 심장’이라 불리는 고대 마법의 정수를 재건하기 위한 마지막 의식을 주관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벨레로폰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시련을 함께 넘고, 서로의 등을 지켜주며 전장을 누볐던 유일한 친구이자, 카이렌 왕국의 최고 사령관. 벨레로폰의 존재는 카이렌에게 있어 바위처럼 굳건한 신뢰 그 자체였다.
의식이 절정에 달했을 때, ‘별의 심장’이 빛을 발하며 카이렌의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힘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전율에 카이렌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금속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미안하다, 친구여.”
벨레로폰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분해서, 마치 일상적인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담긴 냉기는 카이렌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차가운 칼날이 그의 등에 박혔다. 단순히 물리적인 고통이 아니었다. 그 칼날은 ‘별의 심장’과 연결된 그의 마력을 송두리째 뽑아내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피와 함께 그의 힘이 새어 나갔다.
카이렌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겨우 뒤를 돌아봤다. 벨레로폰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승리자의 미소이자, 모든 것을 계획한 자의 오만한 미소였다. 그의 손에는 ‘망각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왕실의 가장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던, 오직 심장을 꿰뚫어 모든 마력을 흡수하는 저주받은 유물.
“나약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 자네는 너무나도 이상주의적이었지. 백성을 위한다는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진정한 힘은 오직 한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바로 나의 것.”
벨레로폰은 ‘별의 심장’의 에너지가 담긴 구슬을 들고 서 있었다. 카이렌의 몸에서 뽑아낸 그의 모든 마력이 응축된 것이었다.
“망각의 틈새로 꺼져라, 카이렌. 네 이름도, 네 존재도 영원히 잊힐 것이다.”
벨레로폰의 손짓에 카이렌은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살점과 영혼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별의 심장’의 빛을 흡수하며 거만하게 서 있던 벨레로폰의 얼굴이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둠 속에서 카이렌은 존재의 의미마저 잃어버릴 뻔했다. 그러나 그의 심장 깊은 곳에 타오르는 복수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망각의 틈새’. 이곳은 세상의 모든 기억과 존재가 사라지는 곳,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모든 금지된 힘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몸으로 더 깊은 심연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살기 위해서,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그는 심연의 가장 밑바닥에서 고대의 존재를 만났다. 이름 없는 그림자, 존재하지 않는 힘. 그것은 카이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가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카이렌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영혼을 대가로, 심연의 힘을 받아들였다.
몸이 찢겨지고 재조합되는 고통. 의식이 흐려지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의 육체는 인간의 형태를 잃어갔다. 피부는 비늘처럼 단단해지고, 손톱은 맹수의 발톱처럼 길어졌으며, 검은 마력이 안개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별의 심장’과는 다른, 순수한 파괴의 힘이었다.
그리고 두 달 후.
카이렌은 망각의 틈새를 뚫고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의 왕국은 벨레로폰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백성들은 노예처럼 부림당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벨레로폰은 ‘별의 심장’의 힘을 이용해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며 폭정을 일삼았다.
“기다려라… 벨레로폰.”
카이렌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고, 대지는 생기를 잃었다. 그는 잔존 세력을 규합하거나, 정의를 외치는 대신, 오직 파괴만을 추구했다. 벨레로폰에게 충성하는 도시들을 하나씩 불태우고, 그의 군대를 섬멸했다.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자비로운 왕이 아니었다. 검은 날개를 펼친 악마와도 같았다.
그리고 오늘, 그는 왕궁의 제단 앞에 섰다. 벨레로폰이 스스로를 위한 축성 의식을 거행하던 바로 그 장소였다.
“네 놈의 숨통을 끊어주마.”
카이렌의 눈동자에서 검은 불꽃이 솟구쳤다. 폐허가 된 제단 위, 옥좌에 앉아 있던 벨레로폰이 그를 발견했다. 벨레로폰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별의 심장’의 힘으로 무장한 자신의 새로운 육체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카이렌. 겨우 살아 돌아왔을 줄이야. 망각의 틈새가 너에게 너무 관대했군.”
벨레로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온몸에서 찬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별의 심장’의 빛. 한때 카이렌의 것이었던 힘이 벨레로폰을 휘감고 있었다.
“실망이 크다. 고작 이런 추악한 모습으로 돌아오다니. 네 왕국은 나의 것이 되었고, 네 백성들은 이제 나를 숭배한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나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백성들을 노예로 삼고, 내 이름을 더럽힌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카이렌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검은 더 이상 단순한 강철이 아니었다. 심연의 마력이 스며들어 검은 그림자를 뿜어내고 있었다.
“네가 가진 힘은 나의 잔재일 뿐. 나의 진정한 힘은… 이것이다!”
카이렌의 몸에서 검은 마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대지는 갈라지고, 제단의 석상들이 먼지가 되어 바스러졌다. 벨레로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카이렌의 힘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심연의 힘은 ‘별의 심장’의 빛을 잠식하려는 듯 꿈틀거렸다.
“어리석은 놈!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네 힘은 파괴만을 부를 뿐. 나는 창조의 힘, 번영의 힘을 가졌다!”
벨레로폰의 손에서 거대한 별똥별이 쏟아져 내렸다. 하나하나가 건물을 파괴할 정도의 위력을 지닌 빛의 구체들이었다. 카이렌은 피하지 않았다. 검은 마력의 장벽을 펼치자, 별똥별들이 부딪히며 소멸했다. 마력의 충돌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네가 창조한 것은… 고통과 절망뿐이다!”
카이렌은 돌진했다. 그림자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검은 기운이 벨레로폰의 빈틈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벨레로폰은 ‘별의 심장’의 힘으로 재빨리 빛의 방패를 생성했지만, 카이렌의 검은 방패를 뚫고 지나갔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벨레로폰의 어깨를 스쳐 지나간 검이 깊은 상처를 남겼다. 푸른 피가 솟구쳤다. 벨레로폰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경악이 스쳤다.
“이럴 수가… 너 따위가…!”
“나 따위? 너는 나를 잊었나? 나는 이 왕국의 왕이었고, 너의 친구였다!”
카이렌의 목소리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하지 않았다. 그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졌다. 검은 마력이 벨레로폰의 주위를 맴돌며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벨레로폰은 ‘별의 심장’의 힘을 총동원하여 반격했지만, 그의 공격은 카이렌의 검은 그림자에 흡수되거나 흩어져 버렸다.
“이것이 네가 선택한 길의 끝이다, 벨레로폰!”
카이렌은 검을 벨레로폰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심연의 마력이 벨레로폰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벨레로폰의 온몸에서 ‘별의 심장’의 푸른빛이 격렬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빛과 어둠의 충돌. 벨레로폰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이 힘은 나의 것이야! 내가 이 왕국의 신이라고!”
“신이라고? 너는 고작 나약한 인간일 뿐. 탐욕에 눈이 멀어 친구를 배신한 추악한 배신자일 뿐이다!”
카이렌은 검을 비틀었다. ‘별의 심장’의 힘이 벨레로폰의 몸에서 빠져나와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벨레로폰의 얼굴은 경악과 공포, 그리고 후회로 일그러졌다. 그의 육체는 마력의 역류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카이렌… 친구여… 제발….”
벨레로폰의 마지막 말은 처량한 울음이었다. 카이렌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마지막 빛줄기마저 소멸시켰다. 벨레로폰의 몸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 복수는 완성되었다.
카이렌은 텅 빈 눈으로 벨레로폰이 앉아 있던 옥좌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아직도 희미하게 어둠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승리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환희도, 만족도, 심지어 분노마저도 사라지고 텅 빈 공허만이 가득했다. 그의 몸을 지배하는 심연의 마력은 이제 그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인간도 아니었다.
검은 마력에 휩싸인 카이렌은 폐허가 된 왕궁을 뒤로하고 돌아서서 밤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발자취가 닿는 곳마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파괴한 자의 뒤에 남은 것은, 끝없는 어둠과 적막뿐이었다. 그의 복수는 완벽했지만, 그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