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지긋지긋한 야근의 굴레에서 겨우 벗어났다. 낡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민준은 그제야 어깨에 얹혀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길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거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터벅거렸다. 스위치를 누르자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아파트 내부가 환하게 드러났다. 20평 남짓한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가구들은 늘 그렇듯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후으…”

깊은 한숨과 함께 넥타이를 풀었다. 주방으로 향해 물 한 잔을 마시려던 순간, 민준의 눈길이 싱크대 위에서 멈췄다. 며칠 전부터 애용하던 푸른색 세라믹 머그컵 하나가 묘하게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분명 그는 항상 반듯하게 컵을 엎어두곤 했다.

‘내가 피곤해서 깜빡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컵을 바로 세웠다. 어차피 피곤에 절어 모든 것이 흐릿했다.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사소한 이상함들은 계속됐다. 거실 탁자 위 리모컨이 소파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거나,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책이 펼쳐진 채 발견되는 식이었다.

‘정말 정신이 없긴 없나 보네.’

스스로를 탓하며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을 뉘인 민준은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새벽 두 시.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민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잠결에 몸을 움찔거린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두 방망이질 쳤다. 분명 주방에서 들린 소리였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복도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숨소리마저 조심하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 아래, 싱크대 근처 바닥에 와인잔 하나가 깨져 있었다.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들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민준은 입을 틀어막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분명 어제저녁엔 와인을 마시지 않았다. 와인잔은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인잔은 스스로 찬장을 열고 나와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이 난 모양이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누구… 누구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아파트 전체를 감싸는 듯한 묵직한 정적만이 그의 질문에 답했다. 민준은 급히 거실로 향해 불을 켰다. 환해진 실내에서 깨진 와인잔을 다시 확인했다. 유리 조각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

그날 이후, 기괴한 일들은 점차 빈번해졌다.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려 있었다거나, 욕실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노후된 아파트라 그런가 보다’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다. 하지만 10년도 채 되지 않은 이 아파트에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날 리 없었다. 게다가 소리는 점점 커지고, 움직임은 더욱 대담해졌다.

어느 날은 텔레비전을 보는데, 갑자기 채널이 저절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처음에는 리모컨 오류인 줄 알고 배터리까지 교체했지만, 현상은 계속되었다. 텔레비전 화면은 지지직거리며 이상한 노이즈를 뿜어냈다.

점점 잠을 이루기 힘들어졌다. 밤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스스슥’, ‘덜컥’, ‘끼이익’. 밤은 더 이상 휴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도리어 고문과도 같았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초췌해진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민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온몸이 피로했지만, 눈은 잠시도 감을 수 없었다. 감으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 하나가 쿵, 하고 크게 흔들렸다. 민준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액자는 기울어졌을 뿐,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가 한숨을 쉬려던 찰나,

‘파아앙!’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컵이 갑자기 폭발하듯 산산조각 났다.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민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의 눈앞에서, 아무런 외부 충격 없이, 컵이 스스로 터져버린 것이다.

공포가 심장을 꿰뚫었다.

그때부터였다. 거실의 모든 가구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파가 삐걱거리고, 책장의 책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스탠드 조명이 제멋대로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쾅, 쾅, 쾅!’ 부엌과 침실에서도 둔탁한 소리들이 연달아 들려왔다. 마치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생명체라도 된 양, 온몸으로 불쾌한 소음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흐읍, 흐읍…”

민준은 소파 등받이에 바싹 붙어 온몸을 웅크렸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미친 듯이 울리는 소음 속에서 그의 귓가에 맴도는 건, 단 하나의 생각이었다.

‘도망쳐야 해. 여기서 벗어나야 해.’

그때, 소파 위, 그의 바로 옆에 놓여 있던 쿠션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는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주먹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대로 민준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퍽!’

코끝을 스쳐 지나간 쿠션은 민준의 뒤편 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크아악!”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민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내달렸다. 손이 떨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기가 힘들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숫자를 눌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해제되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닫혀 있던 현관문이 갑자기 쿵, 하고 닫혔다.
아니, 닫힌 것이 아니었다.

‘쾅!’

마치 거대한 손이 문을 잡아 누르기라도 한 듯, 육중한 현관문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문 전체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안쪽 잠금장치가 저절로 ‘철컥’ 소리를 내며 채워졌다.

민준은 얼어붙었다.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의 아파트는 이제, 그를 가두는 거대한 감옥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귀 바로 옆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민준아…”

귓가를 파고드는 싸늘한 음성은, 분명 제 이름 석 자를 부르고 있었다.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이 아파트는, 그의 집은, 더 이상 그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거기엔, 그와 함께 살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끝에서,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흐릿한 형체는,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멎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아파트 전체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민준은 홀로 남겨졌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코앞에 서 있다는 것을.

***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