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 심연 속 속삭임
어둠이 깃든 함선 내부, 카이의 손은 차가운 금속 난간을 꽉 쥐고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냉기가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것 같았다. 모니터에는 붉은 경고등이 깜빡였고, 비상 사이렌 소리가 찢어질 듯 울렸다. 하지만 그 모든 소음 속에서도, 카이의 귓가에는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이 맴돌았다.
“카이… 도망쳐야 해.”
엘리아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고, 동시에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귓속이 아니라, 심장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생생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던 그 잔인한 속삭임. 그는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전장의 혼란이 빚어낸 환청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젠장…!”
카이는 거친 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지금 ‘아르콘’ 요새의 최전방 방어선에 있었다. 이곳은 인류와 실리안 종족 간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는 최후의 보루였다. 인류의 기함 ‘불굴’이 직접 지휘하는 방어선이자, 실리안 함대의 지속적인 파상 공세에 겨우 버티고 있는 위태로운 전장이었다.
“카이 소위! 출격 준비 완료됐습니다! ‘천둥매’가 대기 중입니다!”
통신관의 다급한 외침이 그를 현실로 끌어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전술 지도를 응시했다. 실리안 함대가 4구역의 방어선을 맹렬히 돌파하고 있었다. 그들의 유기체형 함선들은 암흑 속에서 푸른 빛을 발하며, 마치 살아있는 포식자처럼 인류의 방어막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라는 말인가? 이 전쟁에서? 아니면… 그녀로부터?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엘리아는 그에게 도망치라 말했지만, 그 목소리 속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한 깊은 연민과 더불어, 알 수 없는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카이는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냉철하게 생각해야 했다. 그는 인류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는 파일럿이었다. ‘천둥매’의 조종사, 인류의 영웅. 그의 개인적인 감정은 전장에서는 사치일 뿐이었다.
격납고는 전장의 열기로 가득했다. 거대한 메카닉들이 굉음을 내며 출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육중한 강철의 몸체가 뿜어내는 열기, 섬광처럼 터지는 스파크, 그리고 수많은 정비병들의 다급한 움직임.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익숙한 일상이었다.
그의 ‘천둥매’가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까만 장갑 위에 붉은색 번개 문양이 새겨진 육중한 기체. 그는 자신의 메카를 올려다보았다. 이 메카는 단순히 병기가 아니었다. 그의 몸이자, 그의 의지였고, 엘리아가 없는 세상에서 그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조종석에 몸을 싣자, 차가운 금속과 땀에 젖은 가죽 시트가 그의 몸을 감쌌다. 헬멧을 쓰고 바이저를 내리자, 시야는 온통 전술 정보와 인터페이스로 채워졌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매캐한 금속 냄새와 오존 냄새가 뒤섞인 조종석 공기가 그의 폐를 채웠다.
‘천둥매, 시스템 올 그린. 출격 대기.’
인공지능의 음성이 평온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카이의 심장은 마치 격렬한 폭풍우 속 작은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온몸의 신경망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는 듯한 감각. 그의 뇌리에, 마치 얼음장 같은 손길이 직접 닿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스쳤다.
*‘카이… 날 찾아… 더 늦기 전에…’*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명백하고 또렷한, 그의 의식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엘리아의 목소리. 슬픔과 다급함, 그리고 절망적인 애원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녀의 감정이 너무나 생생하게 전해져서, 카이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마치 그녀의 심장이 그의 가슴 속에서 직접 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엘리아…!”
그는 무심코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바이저 속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날 찾아달라고? 무엇을? 왜?
“소위님! 출격 허가! 발진하십시오!”
통신관의 다급한 재촉에 카이는 이성을 붙잡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뇌리에서 메아리쳤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그녀와 그는 적이었다. 종족도, 사상도, 모든 것이 달랐다. 그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금지된 것이었고, 그 끝은 파멸뿐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천둥매’의 부스터가 굉음을 내며 점화되었다. 육중한 기체가 부드럽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격납고의 거대한 문이 열리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불지옥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밤하늘은 실리안 함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에너지 광선과 인류의 방어 포탑에서 쏟아지는 붉은 레이저가 뒤섞여 섬광으로 번뜩였다. 거대한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잔해들이 우주 공간을 유영했다. 비명과 경고음이 뒤섞인 통신 채널은 아수라장이었다.
“이쪽은 천둥매! 4구역 진입한다! 적 함대 밀집 지역 확인!”
카이는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아귀에선 땀이 배어났다. 그는 엘리아의 목소리를 지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투에 몰입하려 했다. 그는 기체를 맹렬하게 조종하며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실리안의 함선들은 우아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유기체처럼 살아 숨 쉬는 푸른 함선들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들의 에너지 포화는 인류의 방어막을 찢어발기고 있었고, 인류의 함선들은 하나둘씩 섬광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카이는 기체를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며 날아오는 에너지 포화를 피했다. ‘천둥매’의 어깨에 장착된 미사일 포드가 불을 뿜었다. 웅장한 폭발과 함께 실리안 전투정 여러 척이 산산조각 났다.
“실리안 주력함 접근 중! 다수의 실리안 전투정을 대동하고 있습니다!”
통신관의 절규에 카이는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푸른빛으로 물든 거대한 실리안 함선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기함, ‘심연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 기함을 호위하는 수많은 전투정들…
그런데, 그 함대 한가운데서, 카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기체가 있었다. 다른 실리안 전투정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작고 날렵하며, 마치 살아있는 수정 조각처럼 영롱한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기체는 주력함의 최전방에서 인류의 방어 포탑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날 찾아… 더 늦기 전에…’*
엘리아의 목소리가 뇌리에 번개처럼 스쳤다.
“…엘리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었다. 그녀는 전선에 나서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실리안 종족의 *희망*이었다. 그들의 미래. 감히 전장에 나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영롱하면서도 슬픈, 너무나도 강렬한 파동.
카이가 조종간을 틀어 그 기체를 향해 돌진하려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인류의 구축함에서 발사된 거대한 에너지 캐논이 ‘심연의 눈’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갔다. 섬광이 우주 공간을 갈랐다.
그 순간, 엘리아의 기체가 놀라운 속도로 궤도를 틀었다. 그리고는 마치 방패라도 되는 듯, ‘심연의 눈’의 전방으로 날아들었다.
콰아앙!
지구 전체를 뒤흔들 것 같은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구축함의 에너지 캐논이 엘리아의 기체를 정통으로 강타했다. 영롱한 푸른빛이 일순간 폭발과 함께 사라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부서진 파편들이 우주 공간을 수놓았다.
“엘리아!!!”
카이의 비명은 통신을 타고 퍼져 나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군인도 내서는 안 될 절규가 담겨 있었다. 동료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존재의, 그것도 금지된 사랑의 상대의 소멸을 목격한 처절한 외침이었다.
바이저 속 그의 눈에선 뜨거운 것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아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폭발의 잔해 속에서, 부서진 파편들이 다시금 모여드는 듯한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푸른빛이 점멸하며, 마치 거대한 수정 조각들이 조립되듯,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부서진 엘리아의 기체가… 스스로를 재구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작고, 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기체의 투명한 선체 안에서, 한 존재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수정으로 이루어진 듯한 피부. 인간과는 다른,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눈동자. 비록 전신이 빛나는 갑옷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카이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엘리아였다.
그녀의 눈빛이 전장의 혼란을 뚫고, 오직 카이만을 향했다. 그 눈동자에는 슬픔과 고통,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알 수 없는 체념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 마지막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카이. 우린… 이제 끝났어.’*
그녀의 기체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카이를 향해, 아주 느리게, 마치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하려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다시, 거대한 실리안 함대 깊숙이 사라져갔다.
“엘리아…!”
카이는 조종간을 쥔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말에서 느껴지는 절망감에 그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끝났다고? 무엇이? 그녀의 삶이? 아니면… 그들의 금지된 인연이?
그는 눈앞에 펼쳐진 전장을 보았다. 실리안 함대가 다시금 맹렬한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그 속에는 방금 전 엘리아의 모습이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다.
카이의 ‘천둥매’는 홀로 우주 공간에 정지해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사랑하는 여인을 쫓아 적진으로 돌진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조국과 동료들을 위해, 그녀의 종족에게 총을 겨눌 것인가.
푸른 심연 속에서, 그녀의 마지막 속삭임이 찢겨나가는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의 눈앞에는 오직, 망설이는 두 손만이 남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