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을 헤매었다. 짙은 안개, 혹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법한 회색빛 먼지 속을. 나는 그 안에서 오직 하나의 질문만을 되뇌었다. ‘왜.’
나는 신해율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미스터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던 탐정. 재능이요? 그래, 인정한다. 내게는 사소한 조각들 속에서 거대한 진실을 꿰어 맞추는 비상한 통찰력이 있었다. 밀실 살인? 흔적 없는 범죄? 내게 그런 건 그저 잘 짜인 퍼즐에 불과했다. 나는 수없이 많은 난제들을 풀어냈고, 수많은 범죄자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이었다. 마치 목마른 자가 단비를 만난 것처럼.
하지만 그 삶은 너무나도 지리멸렬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사건, 끊임없이 머리를 괴롭히는 추리, 잠 못 이루는 밤들. 마지막 사건을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평소처럼 이어폰을 끼고 최신 스릴러 소설 오디오북을 듣고 있었지. 어쩌면 조금 피곤했을 수도, 어쩌면 조금 방심했을 수도. 그때였다. 저 멀리서 울리는 경적 소리조차 희미하게 들렸던 건. 눈앞을 가득 채운 거대한 빛과 엄청난 충격.
나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불과 서른두 살의 나이로. 내 삶은 오직 추리만을 위해 존재했건만, 정작 내 죽음의 원인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어리석은 ‘교통사고’였다. ‘왜.’ 나는 죽는 순간까지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내 재능이 고작 이 정도로 끝맺음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천장이 보였다. 창문 너머로는 내가 살던 도시의 삭막한 빌딩 숲 대신, 신비로운 빛을 내는 거대한 나무와 푸른 숲이 펼쳐져 있었다. 혼란스러움도 잠시, 나는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새로운 육체. ‘카엘’.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 은회색 머리카락, 그리고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 거울 속에 비친 나는, 과거의 신해율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는 내가 알던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마법이 존재하고, 검과 방패가 여전히 힘을 가지는 곳. 하지만 동시에 논리와 이성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계였다.
나는 카엘이라는 이름의, 한때 몰락한 귀족 가문의 막내아들이었다. 몸은 병약했지만, 어릴 때부터 남다른 총명함으로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고서를 탐독하고 복잡한 수수께끼를 푸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했다. 완벽한 빙의였다. 나는 전생의 기억과 추리 능력, 그리고 이 세계 ‘카엘’의 총명함을 모두 갖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평화로웠다. 나는 카엘로서, 조용히 책을 읽고, 오래된 유적의 비밀을 탐구하며 지냈다. 추리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사건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그게 나를 더 괴롭게 했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추리 본능은 끊임없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있었지만, 그 발톱을 휘두를 대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고요했던 나의 저택에 한 명의 기사가 급히 찾아왔다. 땀으로 얼룩진 갑옷을 입은 그는 채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다급하게 외쳤다.
“카엘 님! 에버하트 경께서… 에버하트 경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에버하트 경. 그는 이 지역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이었다. 그의 죽음은 분명 이 조용한 마을을 뒤흔들 만한 대사건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기사를 맞았다.
“진정하고 말해보시오. 에버하트 경께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이오?”
“어젯밤, ‘별 그림자 저택’의 서재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셨습니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창문은 굳게 걸쇠로 잠겨 있었습니다. 밀실… 완벽한 밀실입니다!”
기사의 목소리에는 공포와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속으로 희미한 전율을 느꼈다. 밀실 살인. 이세계에 와서 내가 가장 갈망했던, 하지만 다시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던 그 단어. 나의 오랜 갈증이 해소될 순간이었다.
“날 ‘별 그림자 저택’으로 데려가 주시오. 지금 당장.”
***
말을 달려 ‘별 그림자 저택’에 도착했을 때, 저택은 이미 혼비백산이었다. 하인들은 떼 지어 수군거렸고, 경비병들은 통제되지 않는 혼란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에버하트 경의 시신이 발견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풍경이었다.
나를 맞이한 것은 이 지역 경비대장인 갈리온이었다. 그는 거구의 사내로, 투박하지만 성실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좌절감이 역력했다.
“카엘 님! 정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저택 내 모든 경비병이 서재 주변을 봉쇄했지만,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갈리온 대장.”
갈리온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자정 무렵, 에버하트 경께서는 서재에서 홀로 책을 읽고 계셨습니다. 평소에도 그러시던 터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 경을 모시는 집사가 아침 식사를 권하기 위해 서재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경비병들과 함께 강제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발견했겠군.”
“네. 경께서는 자신의 책상에 쓰러져 계셨습니다. 등에는… 짧은 비수가 깊숙이 박혀 있었습니다. 치명상이었죠.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서재의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다는 겁니다. 빗장을 걸어 잠근 채로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바로 ‘밀실’의 핵심이다.
“창문은 어떻소?”
“모든 창문은 안에서 쇠로 된 걸쇠가 단단히 잠겨 있었습니다. 게다가 서재는 2층에 위치해 있으며, 아래로는 아무런 발판이나 흔적도 없었습니다. 벽난로 굴뚝은 너무 좁아 사람이 드나들기 불가능했고, 비밀 통로 같은 것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유령이 들어와 경을 살해하고는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갈리온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을 마쳤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이미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의 가능성과 가설들을 조합하고 있었다. 전생의 나는 이런 순간을 위해 존재했으니까.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피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나는 거대한 서가에 빼곡히 꽂힌 책들, 묵직한 오크 나무 책상, 그리고 그 위에 엎어진 채 싸늘하게 식어버린 에버하트 경의 시신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등에는 자루만 보이는 비수가 박혀 있었고, 옷은 피로 흥건했다.
“시신은 건드리지 않았겠지?” 내가 물었다.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혹시 놓친 단서가 있을까 하여.” 갈리온이 답했다.
나는 시신에 다가가지 않고, 방 전체를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둘러보았다. 나의 눈은 단순한 시선이 아니었다. 각각의 사물, 미세한 먼지 한 톨, 바닥의 긁힌 자국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모든 정보를 흡수하고 분석했다.
벽난로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창문은 갈리온의 말대로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고, 창살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만이 이 불길한 공간에 유일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문고리는 확실히 안에서 걸쇠가 내려진 상태였다.
방 중앙, 에버하트 경의 시신이 엎어져 있는 책상 위에는 잉크병과 깃펜, 그리고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로 쓰인 문서가 놓여 있었다. 문서의 내용은 어딘가 급하게 쓰인 듯, 글씨체가 다소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책상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버하트 경의 손가락 끝이 닿았을 법한 책상 모서리,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작은 은제 서류함. 서류함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리고… 나의 시선이 멈춘 곳은 바로 그곳이었다. 책상 아래, 에버하트 경의 시신 바로 옆 바닥. 아주 미세하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작은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마치 톱밥 같은, 하지만 톱밥이라고 하기엔 너무 균일하고 윤기 있는 조각이었다.
“이 조각은… 대체 무엇이지?”
나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갈리온은 내가 가리킨 곳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엘 님, 무엇이 보이십니까?”
나는 대답 대신 한 발짝 더 나아가 조각을 주웠다. 손가락 끝에 올려놓고 자세히 살펴보자, 그것은 일종의 나뭇결이 있는 작고 얇은 조각임을 알 수 있었다. 톱밥이 아니었다. 누군가 무언가를 깎아낸 흔적, 혹은 부서진 파편이었다.
‘에버하트 경의 등에는 비수가 꽂혀 있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분명….’
나는 다시 서재 전체를 둘러보았다. 나의 시선은 이제 더 이상 단순히 정보를 모으는 것을 넘어, 수집된 조각들을 조합하고 있었다. 에버하트 경의 시신 위치, 비수의 방향, 문과 창문의 상태, 그리고 이 작은 나뭇결 조각.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갈리온은 내가 침묵하는 동안에도 애가 타는 듯 보였다.
“카엘 님… 혹시 단서라도 찾으셨습니까? 정말… 정말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나는 손에 쥔 나뭇결 조각을 슬쩍 쥐었다 펴고는, 시신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대장께서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했을 뿐이오.”
내 말에 갈리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창밖으로 멀리 펼쳐진 숲을 바라보았다. 전생에서 수많은 밀실 사건을 해결하며 얻은 확신이 내 안에서 다시금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세계의 마법조차 해결할 수 없다는 완벽한 밀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또 하나의 퍼즐에 불과했다.
“대장. 이 밀실은… ‘닫힌 방’이 아니었소.”
갈리온의 얼굴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예? 문은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고….”
“그 빗장 말이오. 분명 안에서 걸려 있었겠지. 하지만 그 빗장이 ‘살해당하기 전’에 걸려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군.”
나의 말은 갈리온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의 눈에는 경악과 함께 한 줄기 희망이 스쳤다.
“살해당한 후에… 밀실이 만들어졌다? 그게 대체…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내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내 발톱을 휘두를 대상이 나타났군.’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비로소, 내가 이세계에 온 이유를 찾은 것만 같았다.
이 완벽해 보이는 밀실을 깨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카엘이라는 육체에 깃든 신해율의 존재 이유였다.
이제, 게임을 시작할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