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아파트에 깃든 검은 그림자

이진호.

한때 강호의 피바람 속에서 검 한 자루로 모든 것을 평정했던 그 이름. 지금은 그저, 도시의 고층 아파트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이웃집 남자’일 뿐이었다. 그는 허름한 도포 대신 편안한 면 소재의 옷을 입고, 웅장한 산세 대신 창밖으로 펼쳐진 아스팔트와 빼곡한 고층 빌딩 숲을 응시하곤 했다. 스스로 택한 고요함이었다. 더 이상 피 냄새와 살기 가득한 시선에 지쳐 숨 쉬고 싶지 않았다. 지난 세월, 지독한 족쇄처럼 자신을 옭아맸던 ‘검’이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삶의 한 조각을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요함이란 때로는 가장 요란한 폭풍의 전조가 되기도 하는 법.

최근 들어 그의 아파트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였다.

주방 싱크대 위, 엊그제 자신이 분명 반듯하게 놓아두었던 찻잔이 어느새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깨지진 않았지만, 그 모습이 묘했다. 마치 누군가 신경질적으로 내던진 것처럼. 처음엔 ‘내가 피곤해서 그랬나’ 했다. 워낙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이라 잠결에 실수했을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밤마다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진호의 평온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벽장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닫히는가 하면, 거실의 텔레비전이 갑자기 ‘칙-‘ 하는 노이즈 소리를 내며 채널이 바뀐 적도 있었다. 전원이 꺼진 상태에서. 진호는 처음엔 가전제품의 고장이나 노후화로 치부하려 했다. 혹은 공동주택의 미세한 진동이 만들어내는 착각이라고. 그러나 그의 직감은, 아니, 수십 년 강호에서 갈고닦은 그의 ‘오감’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기(氣)…인가?”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온몸의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주변의 미세한 흐름을 읽으려 했다. 강호에서 수많은 고수들과 겨루며 익힌 그의 내공은 단순히 몸을 단련하는 것을 넘어, 세상의 보이지 않는 흐름까지도 감지하게 해주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기, 무형의 기운들. 하지만 이곳, 현대 도시의 철골 구조물 속에서는 명확한 ‘살기’나 ‘투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러운, 불분명한 ‘파동’만이 감지될 뿐이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가 던져진 후 퍼지는 파문처럼,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기운이 이 공간을 휘젓고 있었다.

그는 애써 무시하려 했다. 이런 무형의 존재는 강호에서 검으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세계의 잡귀’ 정도로 치부하고 그의 고요한 명상에 집중하려 했다.

어느 날 새벽. 진호는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정신은 저 멀리, 무한한 우주의 끝자락을 유영하는 듯했다. 그때였다.

‘쿵!’

갑자기 거실에서 들려온 굉음이 그의 정신을 현실로 강제로 끌어당겼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였다. 진호는 번개처럼 눈을 떴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그의 ‘애검’이었다. 벽에 걸려 있던 검이 마치 누군가 내던진 것처럼 떨어져 있었다.

그의 검은 단순한 검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함께 강호를 누볐던, 그의 정신과 육체의 일부였다. 백보 밖의 촛불도 가를 수 있는 예리함, 만 명의 적을 앞에 두고도 흔들림 없는 강인함. 그가 벽에 걸어둘 때는 늘 완벽하게 균형을 맞춰,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게 두었다. 하물며, 저절로 떨어질 리는 만무했다.

진호는 검을 주워들었다. 차가운 강철의 감촉.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익숙한 무게감이 그의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일깨우는 듯했다.

“무슨 짓이냐.”

그는 나직이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단순한 짜증을 넘어, 오랜만에 느껴보는 ‘위험’에 대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그의 시선은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현관문은 잠겨 있었다. 외부 침입의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집 안에, 그 자신 외의 ‘무언가’가 있다는 뜻인가? 그는 이제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신했다. 이것은 자연 현상도, 단순한 고장도 아니었다. 어떤 의지를 가진 존재의 소행이었다.

그가 검을 다시 벽에 걸려는 순간.

갑자기, 거실의 모든 조명이 ‘팟, 팟, 팟!’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어둠과 빛이 불안하게 교차하며 섬뜩한 그림자들을 만들어냈다.

‘쉬이이익…’

어디선가 들려오는 섬뜩한 바람 소리. 창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도, 마치 영하의 칼바람이 불어닥치는 듯한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피부가 쭈뼛 서는 느낌. 그리고, 눈앞의 텔레비전 화면이 ‘지지직-‘ 거친 노이즈를 내며 켜지더니, 아무런 채널도 잡히지 않는 백색 노이즈 화면 속에서 흐릿한 ‘형체’가 어른거리는 것을 진호는 보았다. 사람의 형체… 같기도 하고, 그림자 같기도 한. 그것은 일렁이며, 마치 그를 노려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무례한 것 같으니.”
그는 내공을 끌어올려 주변의 한기와 ‘형체’의 파동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었다. 그의 내공이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그의 정신을 파고들려 하는 무형의 기운이었다.

그는 다시 검을 쥐었다. 이번에는 마치 검집에서 칼날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살기가 검신을 감쌌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검술가의 본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의 검은 한 번 뽑히면, 무언가를 베지 않고는 다시 검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강호의 불문율이 있었다.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든, 이진호의 보금자리를 침범한 죄는… 크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봉인되었던, 강호 최고수의 압도적인 기세가 아파트 안에 퍼져나갔다. 공기마저 팽팽하게 긴장하며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텔레비전 속의 형체가 더욱 짙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거실의 모든 가구들이 ‘덜컹덜컹!’, ‘덜그럭덜그럭!’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파가 스스로 들썩이고, 식탁의 의자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던지는 것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접시들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찬장 밖으로 튀어나와 깨지고, 벽에 걸린 그림 액자들은 제멋대로 삐뚤어지거나 아예 떨어져 박살 났다. 완벽한 아비규환.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이 분노에 휩싸여 집안을 때려 부수는 것 같았다. 물건들이 허공을 날아다니고, 벽에 부딪히며 파편을 흩뿌렸다.

진호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눈은 빠르게 움직이는 모든 물체들을 쫓고 있었다. 그는 강호에서 수많은 기이한 술법과 기문둔갑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런 노골적인 ‘물리적 간섭’은 처음이었다. 이건 그저 ‘귀신 놀음’이 아니었다. 분명한 힘이 개입된 현상이었다.

그때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육중한 떡갈나무 탁자가 ‘스윽-‘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진호를 향해 ‘쾅!’ 하고 돌진해 왔다.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탁자가 날아오는 광경은, 현실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일반인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호의 눈은 흔들림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건방진!”

진호는 짧게 외쳤다. 그의 손에서 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단순한 칼질이 아니었다. 그의 내공이 검 끝에 집중되어, 마치 무형의 검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치이이익!’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탁자가 그의 검 끝에 스치자마자 마치 허공을 벤 것처럼 멈칫하는가 싶더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 나버렸다. 마치 유리처럼 부서진 나무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의 검은, 단순한 칼날이 아니었다. 그의 내공이 응집된, 파괴의 권능이었다.

집안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날아다니던 가구들은 멈추었고, 깨지던 접시 소리도 멎었다.

파편과 먼지로 뒤덮인 거실. 그 한가운데에, 검을 든 진호가 서 있었다. 그의 숨결은 미동도 없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 냉철한 눈빛. 오직, 그의 검 끝에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푸른 기운만이 그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제 나오지 그래.”

진호는 부서진 탁자의 잔해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네놈의 무례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그의 아파트 벽 한쪽이었다. 벽지 위, 원래 아무것도 없던 공간. 그의 시선이 닿는 순간, 벽지의 무늬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두 개가 진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벽 속에 갇힌 짐승처럼, 그 눈동자는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