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컵의 춤
유지아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까지 마감 작업에 매달린 덕에 어깨는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고,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녀의 직업은 웹툰 채색가. 그림의 선은 작가의 몫이었지만, 그 선 안에 생명을 불어넣는 색깔은 온전히 지아의 손에서 탄생했다. 때로는 너무나 현실 같아서, 때로는 꿈처럼 황홀해서, 타인의 이야기에 자신의 감정을 실어 색을 입히는 일은 늘 고되고도 즐거웠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창밖 오래된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을 간지럽히며 거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먼지들이 춤추듯 빛을 가로질렀지만, 지아는 그런 풍경마저도 평화롭다고 느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와 부드러운 면 티셔츠 차림. 젖은 머리카락에서는 은은한 샴푸 향이 났다. 텅 빈 공간, 그녀의 숨소리만이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고요한 오후. 그래, 이 맛에 혼자 산다.
냉장고 문을 열어 탄산수를 꺼냈다. 쨍한 얼음을 서너 조각 넣은 투명한 유리컵에 시럽 대신 레몬 한 조각을 슬라이스해 넣었다. 시원한 기포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캬, 하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이 완벽한 순간을 방해할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 PC를 정리하고, 어지러진 스케치 도구들을 서랍에 밀어 넣었다. 어쩐지 작업실이 좀 더 깨끗해진 기분이었다. 분명 어제 밤새 씨름했던 잉크 자국은 흐릿하게 남아있고, 채색용 붓들도 여기저기 널려있었는데. 이상하다, 나중에 치워야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잠결에 치웠나? 지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피곤함이 머리 위로 짓누르는 탓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잘 됐지 뭐.
다시 소파로 돌아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킬링타임용 드라마나 보며 뇌를 쉬게 해줘야지. 채널을 돌리던 손이 멈칫했다. 탁, 하는 소리. 식탁 위였다.
지아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탄산수를 마셨던 유리컵이 식탁 모서리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아슬아슬하게,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듯이.
“어라?”
분명 식탁 중앙에 놓았었는데. 컵이 워낙 가벼워서 그럴 리 없는데. 지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바닥이 평평하지 않아서, 아니면 미세한 진동 때문에? 설마, 하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식탁 중앙으로 옮겼다. 컵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켰다.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였다. 삐걱, 하는 소리. 그리고 컵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시 식탁 모서리 쪽으로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컵의 밑동을 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찰음이 아스라이 들렸다.
지아는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고개를 젓고 다시 컵을 응시했다. 컵은 멈춰 있었다. 왠지 모르게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뭐야… 나 너무 피곤한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피곤하면 이상한 환각도 보일 수 있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토록 선명하게, 그것도 두 번씩이나?
불안감에 휩싸인 지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번에는 식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컵을 냅다 싱크대로 가져가 버렸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만질 수 없도록, 물이 가득한 개수대에 컵을 엎어놓았다.
“그래, 완벽해.”
작은 승리감에 뿌듯해하며 다시 소파로 돌아갔다. 드라마에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머릿속은 온통 유리컵 생각뿐이었다. 삐걱이는 소리, 천천히 미끄러지던 모습…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시간은 흐르고, 저녁 어스름이 찾아왔다. 밖은 이미 깜깜해진 지 오래였다. 지아는 저녁 식사로 간단하게 샐러드를 만들어 먹고 다시 작업실로 들어갔다. 오늘 내일 중으로 마쳐야 할 마감이 산더미였다.
평소 같으면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작업했을 텐데, 오늘은 헤드셋을 쓰기가 망설여졌다. 혹시라도 헤드셋 너머에서 뭔가 소리가 날까 봐.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공포였다.
스케치된 캐릭터 위에 기본 색을 입히던 중이었다. 조용했다. 너무나 조용했다. 아까의 유리컵 소동은 기분 탓이었을까? 안심하려는 찰나, 탁, 하고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작업실 문이었다. 문이 아주 살짝 열려 있었다.
“내가 안 닫았나?”
분명 들어올 때 닫았던 기억이 났다. 지아는 의자에 앉은 채로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쾅, 하고 닫히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러다간 신경쇠약 걸리겠어.
다시 집중해서 작업하는데, 귓가에 스치는 듯한 아주 미세한 바람이 느껴졌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선풍기도.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태블릿 PC 화면 위로 무언가 작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 자신의 손 그림자는 아니었다. 투명하고, 희미하지만, 움직임은 선명했다. 마치 작은 새가 빠르게 날아간 것처럼.
지아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이자 그림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거… 혹시 귀신인가?”
낮에 유리컵이 움직이던 장면이 다시 머릿속에 재생됐다. 이제는 단순한 피로감이나 착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분명, 뭔가 있다. 이 아파트에, 아니, 이 방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거실은 어둠에 잠겨 희미한 달빛만 비추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겨우 용기를 내어 주방 쪽으로 향했다. 싱크대 개수대에 엎어놓았던 유리컵이 어렴풋이 보였다. 다행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안심하려는 순간, 또 다시 탁, 하는 소리.
이번에는 컵이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컵 안에 고여 있던 물이 출렁이며, 마치 컵이 진동하는 것처럼 작은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컵은 얌전히 개수대 바닥에 붙어 있었지만, 물은 끊임없이 진동했다. 마치 컵 안의 무언가가 발을 동동 구르듯.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소리.
쨍그랑!
지아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주방 찬장 맨 위 칸에 놓여 있던 작은 도자기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지아가 아끼던, 어머니가 직접 빚어주셨던 그릇이었다.
그릇 파편들은 마치 일부러 그렇게 놓은 듯, 섬뜩할 정도로 가지런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파편들 사이에서, 아주 작게,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지아는 보았다.
그것은 동전이었다. 천 원짜리 동전 한 개.
지아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왜 동전이 저기서 떨어져? 그리고 왜 하필 지금?
그녀는 무릎을 꿇고 파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손가락 끝으로 동전을 집어 들었다. 평범한 동전이었다.
그때였다. 귓가에 아주 희미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하고, 킥킥거리는 것 같기도 한 소리.
“누구… 야?”
지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주방은 여전히 고요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동전을 쥔 손바닥 위로, 차가운 공기가 한 줄기 지나갔다. 그리고 동전이 저절로 손바닥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식탁 중앙에 놓여 있던 작은 꽃병 아래로 쏙 들어가 버렸다.
지아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꽃병 아래로 사라진 동전이 있던 자리에, 아주 희미한, 보랏빛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누군가 작은 꽃잎을 남기고 사라진 것처럼.
어머니가 빚어주신 그릇은 깨졌지만, 신기하게도 지아의 마음속에는 공포보다 더 큰, 묘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이 모든 기괴한 현상들이, 어쩌면… 그리 나쁜 의도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그녀는 깨진 그릇 파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주방의 어둠 속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아는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이 순간에도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다시 식탁 위 꽃병 아래로 향했다. 그 아래, 방금 동전이 사라진 곳에서, 아주 희미한, 작지만 분명한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 살아있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지아의 밤은, 이제 더 이상 고요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