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무림 대회”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사실 이 대회가 벌어지는 ‘청운대’는 생각보다 훨씬 웅장하고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했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수만 명의 관중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대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다 못해 아예 구름까지 집어삼킬 기세였다. 문제는, 그 엄청난 열기 속에 나, 은가람은 너무나도 작고 보잘것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저게… 이번 대회의 마지막 8강 진출자라고?”
“쯧쯧, 꽃잎 같은 아가씨가 무림 대회에 왜 나왔을꼬.”
“어쩌면 맹주님의 낙하산이 아닐까? 저런 실력으로 어찌 저기까지… 읍읍!”
귓가에 들려오는 수군거림은 익숙했다. 그래, 인정한다. 내가 보기에도 난 어딜 봐도 연약한 아가씨고, 내가 쓰는 검술은 ‘꽃잎 검법’이라는 한없이 서정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하지만 내가 저들의 멱살을 잡고 “야! 내 검법은 꽃잎처럼 하늘하늘 예쁜 게 아니라 비수처럼 날아가는 꽃잎이라서 꽃잎 검법이야!”라고 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속으로만 되뇌며 손가락 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때였다. 경기장 한가운데 설치된 마법 확성구에서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자, 그럼 대망의 8강 마지막 경기! 드디어 시작됩니다! 먼저, 천검문의 수장이자 현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검객으로 칭송받는, ‘화룡검’ 강휘령 협객입니다!”
환호성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내가 서 있는 대기석까지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화룡검, 강휘령. 그 이름만으로도 천하 무림의 절반은 벌벌 떨고, 나머지 절반은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강자였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오만방자한 싸가지 없는 재수탱이’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사적인 감상이었다.
새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경기장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그림 같았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살랑이고, 조각 같은 이목구비에 걸린 옅은 미소는 마치 그림 속 신선이 현실로 튀어나온 듯 비현실적이었다. 젠장, 저 얼굴을 보면 그의 오만함도, 재수 없음도, 심지어는 내가 그에게 품고 있는 사소한 원한까지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는 게 제일 문제였다.
“그리고! 이에 맞설 마지막 8강 진출자! 조용하지만 강인한 내공을 숨기고 있는, 신비로운 ‘은자문’의 은가람 낭자입니다!”
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경기장 전체는 짧은 침묵에 빠졌다. 이윽고 곳곳에서 “어어? 저 아가씨가 진짜야?” 하는 수군거림과 함께 몇몇은 아예 코웃음을 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래, 웃어라, 실컷 웃어라. 언젠가 내가 너희들의 그 오만방자한 콧대를 꺾어버릴 날이 올 테니까.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애써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강휘령이 서 있는 경기장 한가운데로 다가갈수록 심장이 발바닥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망했다. 하필이면 상대가 그 강휘령이라니!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짙은 호수 같았다. 분명 저 안에는 ‘나 같은 애송이는 한 큐에 보내주마’라는 오만함이 가득 차 있을 게 뻔했다.
젠장, 젠장, 젠장! 세상의 운명이 걸린 이 중요한 대회에서, 하필 내가 저 강휘령과 붙게 되다니! 그것도 8강에서! 누가 봐도 압도적인 승리자와, 그냥 ‘운 좋게 여기까지 올라온’ 약자의 매치업이었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했다.
“안… 안녕하십니까. 강… 강 소협.”
버벅거렸다. 빌어먹을. 평소엔 그를 ‘싸가지 없는 재수탱이’라고 부르는데, 왜 하필 지금은 입이 안 떨어지는 거지? 그의 눈빛 때문인가? 아니면 그의 완벽한 얼굴 때문인가?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여전히 너무 완벽해서 비현실적인 미소였다.
“은가람 낭자. 오랜만이군요.”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경기장에서도 내 귀에만 정확히 들리는 듯했다. 차분하고 낮게 깔리는 목소리. 나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오, 오랜만이라뇨? 저희가 언제… 아, 그… 지난번 연회에서 잠깐 마주쳤었죠?”
속으로 ‘망했다!’를 외쳤다. 그 연회에서 내가 술김에 그에게 뭐라 지껄였던가… ‘당신처럼 잘생긴 남자는 얼굴값을 한다’던가? 아니면 ‘천하제일 미남이라는데, 난 왜 그렇게까지 잘생긴 건지 모르겠다’고 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도 실언을 잔뜩 내뱉었을 게 분명했다. 술만 마시면 평소의 ‘연약한 아가씨’ 가면이 벗겨지고 ‘음침한 독설가’로 변하는 내 주사는 정말 최악이었다.
강휘령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응시했다. 마치 내가 술주정을 했던 그날의 모든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오싹했다. 이대로 경기 시작 전에 내가 먼저 뒷목 잡고 쓰러지는 건 아닐까?
“그때보다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가람 낭자.”
느닷없는 칭찬에 나는 순간 굳어버렸다. 아름답다니? 지금 나보고?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 잠시 머무르는가 싶더니, 이내 나의 허리춤에 찬 검으로 향했다.
“‘꽃잎 검법’의 은가람 낭자가 여기까지 올라올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기대하고 있었죠.”
기대? 그가 나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그 말은 내가 ‘운 좋게 올라온’ 약자가 아니라, 뭔가 숨겨진 힘이라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설마, 내 스승님이 대외적으로는 폐문하고 은거한 지 오래지만, 사실은 천하에 명성이 자자했던 ‘절대 고수’였다는 걸 그가 눈치챈 건가?
이때, 심판의 우렁찬 목소리가 두 사람의 짧은 대화를 잘라냈다.
“자, 양측 선수는 중앙으로! 이 경기는 단순히 두 문파 간의 대결이 아닙니다! 천하의 운명이, 무림의 미래가 걸려 있는 대결임을 명심하고, 정정당당하게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십시오!”
심판의 엄숙한 목고는 대회에 걸린 막중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물론, 나는 지금 ‘천하의 운명’ 같은 거창한 것보다, 내 눈앞에 서 있는 ‘오만방자한 잘생긴 놈’에게 한 방 먹일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말이다.
강휘령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은 이미 검 손잡이에 가 있었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저것이 바로 ‘화룡검’의 기세인가.
젠장, 진짜 저 미소를 확 찢어버리고 싶다! 물론 내 검으로가 아니라, 그냥 내 펀치로!
나는 조용히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래, 세상의 운명? 그런 거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냥 저 잘생긴 오만방자한 놈의 콧대를 한 번 납작하게 만들어주는 거다!
“그럼, 양측 준비되셨으면… 시작!”
심판의 고함과 함께, 경기장 전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강휘령의 푸른 검광이 먼저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내 내 눈앞까지 섬광처럼 뻗어왔다. 피할 틈도 없이, 나는 그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올렸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대결은 단순히 강휘령의 오만을 꺾는 싸움이 아니었다.
내가 숨겨온 모든 것을 드러내야만 하는, 나의 모든 것이 걸린 한 판 승부였다.
그리고 그 승부의 끝에, 그의 미소가 사라진 얼굴이 있다면… 뭐, 나쁘지 않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