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회색빛 노을이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 가는 풍경은 언제나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부서진 빌딩의 뼈대 사이로 스며드는 마지막 햇살은, 한때 번화했을 도시의 잔해를 붉게 물들이며 죽은 자들의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서진은 낡은 방수포로 얼기설기 지붕을 얹은 폐버스 안에서, 한 줌의 말린 육포를 질겅이며 밖을 응시했다. 밤은 항상 위험했고, 고독은 뼈에 사무쳤다.

“오늘도 아무것도 없군.”

작은 중얼거림이 차가운 버스 안에 메아리쳤다. 생존은 매일의 전쟁이었다. 식량을 찾고, 피신처를 만들고, 이 흉포하게 변해버린 세상의 포식자들을 피하는 것. 그 모든 일에 서진은 혼자였다. 아니, 혼자라고 믿어왔다.

다음 날 아침, 짙은 안개가 폐허를 감쌌다. 서진은 낡은 군용 재킷을 여미고 녹슨 칼을 허리춤에 꽂은 채 밖으로 나섰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병원 건물 옥상에는 아직 물탱크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삑삑거리는 Geiger counter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건물의 잔해를 더듬어 오르던 중, 기척을 느꼈다. 털끝 하나 놓치지 않는 예민한 감각이 비상 신호를 보냈다. 낡은 철골 구조물 뒤에 몸을 숨기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아래, 깨진 유리창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것은 이 세상에 나타난 새로운 종족 중 하나였다.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었지만, 등에는 돋아난 검고 푸른 비늘과 머리칼처럼 휘날리는 녹색 덩굴이 기괴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눈동자는 숲의 심연처럼 깊고 고요했으며, 손톱은 날카로운 갈고리 같았다. ‘숲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존재들. 그들은 인간의 기술이 파괴한 자연이 낳은 복수이자 새로운 생명 그 자체였다. 인간들은 그들을 괴물이라 불렀고, 그들은 인간을 ‘파괴자’라 불렀다.

서진은 숨을 죽였다. 숲의 아이들은 희귀하고 위험했다. 그들은 보통 인간에게 무관심했지만, 영역을 침범하거나 위협을 느끼면 가차 없이 공격했다. 서진은 그저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때, 건물 안쪽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인간의 비명이었다. 다른 생존자가 이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숲의 아이가 그를 공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진은 망설였다. 다른 인간을 돕는 것은 종종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기어가 상황을 살폈다.

숲의 아이는 쓰러진 남자를 밟고 서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손톱이 남자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힘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그때, 서진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숲의 아이의 옆구리에서 검붉은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상처였다. 아마도 남자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낸 상처일 터였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서진은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숨겨두었던 손도끼를 뽑아 들고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이봐, 거기! 썩 물러나!”

그녀의 고함에 숲의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심연 같은 눈동자가 서진을 응시했다. 경멸과 동시에 호기심이 스치는 듯했다. 서진은 숨을 헐떡이며 그와 대치했다.

“그 남자를 놓아줘!”

숲의 아이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은 명백한 경고였다. 남자는 이 상황을 틈타 재빨리 도망쳤다. 숲의 아이는 그에게 한 번 시선을 주더니, 다시 서진에게로 돌렸다.

“내가 네 영역을 침범했나? 미안하다. 하지만 살인을 멈춰라.” 서진은 손도끼를 단단히 쥐었다.

숲의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통스러운 듯 옆구리를 감쌌다. 그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는 것을 서진은 놓치지 않았다. 생각보다 깊은 상처인 것 같았다.

“젠장… 다친 것 같군. 날 죽이러 온 게 아니야. 그냥… 네가 다쳤을 뿐이라고.”

서진은 조심스럽게 손도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옆구리 쪽으로 다가갔다. 숲의 아이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발톱은 서진을 겨냥하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약이 있어. 믿지 못하겠지만,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

그녀는 천천히 허리춤에서 낡은 약통을 꺼냈다. 해진 천 조각과 소독약을 꺼내 보이는 서진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숲의 아이는 한참을 그녀와 약통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의심과 함께 알 수 없는 갈망이 스쳤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암묵적인 동의였다.

서진은 조심스럽게 그의 찢어진 비늘 사이로 난 상처를 살폈다. 비늘이 들춰진 아래 피부는 인간의 그것과 비슷하게 보였다. 하지만 비늘은 단단했고, 상처는 깊었다. 소독약을 바르자, 숲의 아이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서진은 깨끗한 천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쌌다.

“이제 됐어. 과출혈만 막으면 돼.”

치료가 끝나자, 숲의 아이는 천천히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서진의 손에 감긴 천 조각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목에 코를 댔다. 차가운 콧잔등이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 인간에게서 맡을 수 없는 풀과 흙내음이 섞인 독특한 향이 풍겼다. 그것은 감사와 경고, 그리고 다른 무언가였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서진은 그 빛 속에서 언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보았다. 숲, 어둠, 고통, 그리고… 연약한 그녀의 모습.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있는 듯한 기시감에 서진은 숨을 멈췄다.

“너….”

숲의 아이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려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서진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심장이 여전히 격렬하게 뛰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가슴을 울렸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서진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완벽한 고독은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늘 숲의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향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녀의 폐버스 문 앞에 작은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껍질이 벗겨진 신선한 열매와,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작은 동물 고기였다. 서진은 꾸러미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 기묘한 교류가 시작되었다. 서진이 식량을 찾으러 나갔을 때, 그녀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누군가 미리 다녀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위험한 포식자들은 이미 처리되어 있었고, 그녀가 찾던 물건들은 쉽게 눈에 띄는 곳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배려 속에서 생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진도 작은 보답을 시작했다. 그녀가 아끼는 달콤한 건포도나 낡은 금속 조각들을 숲의 아이가 나타났던 곳에 두었다.

어느 날 밤, 서진은 버스 옆에서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고, 천둥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때, 숲의 가장자리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그였다. 숲의 아이. 그는 망설이는 듯 잠시 멈춰 서 있다가, 천천히 모닥불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비늘은 빗물에 젖어 더욱 짙은 색을 띠었다.

그는 서진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은 숲처럼 고요했지만, 이제는 낯선 경계심 대신 호기심과 편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비가 올 거야.” 서진이 조용히 말했다.

숲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듯한 미묘한 움직임이 있었다.

“너는… 이름이 있니?”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손가락으로 모닥불 옆의 흙바닥에 무언가를 그렸다. 알 수 없는 상형문자와 같은 그림. 그러고는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그의 눈빛은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카르.” 서진은 그가 그린 형상을 따라 발음했다. “맞아?”

카르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스쳤다. 그것은 인간의 미소와는 달랐지만, 분명한 감정의 표현이었다.

그날 밤, 카르는 서진과 함께 모닥불 옆에 앉아 비를 피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고요함 속에 교감의 실이 엮이고 있었다. 서진은 그의 곁에 앉아 있는 것이 신기하게도 안전하다고 느꼈다. 낯선 종족의 괴물이라 여겼던 존재가, 이제는 세상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로 느껴졌다. 그의 이질적인 아름다움, 자연과 하나 된 듯한 평온함이 그녀의 얼어붙었던 마음에 스며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카르는 서진에게 숲의 지혜를 가르쳤다. 어떤 열매가 안전한지, 어떤 풀이 독성을 지녔는지, 동물의 흔적을 읽는 법. 서진은 그에게 인간의 세상에 남아있던 책들을 읽어주었다. 사랑과 상실, 희망과 절망에 대한 이야기들. 카르는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듯, 깊은 눈동자로 서진을 응시하며 조용히 귀 기울였다.

어느 날, 서진은 낡은 동화책 속의 삽화를 보며 카르에게 물었다. “이게 뭔지 아니? ‘사랑’이라는 거야. 인간들은 서로를 사랑했어.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는 거지.”

카르는 삽화 속의 두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뻗어 서진의 손을 잡았다. 그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따뜻한 손을 감쌌다. 그의 눈빛에는 동화책 속의 사랑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이 그녀의 것과 똑같이, 혹은 더 격렬하게 뛰고 있음을 서진은 느꼈다.

“너도… 날 사랑하는 거니?” 서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서진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의 품에서 서진은 숲의 향기와 함께 알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 그의 심장 박동이 그녀의 귀에 직접 들려왔다. 그것은 야생의 강렬함과 동시에 깊은 연민으로 가득 찬 소리였다.

그들의 사랑은 금지된 것이었다. 인간 사회에서는 카르를 괴물로 여겼고, 숲의 아이들 사이에서는 인간을 파괴자로 불렀다. 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그 강을 건넜다.

어느 날, 낡은 무선 통신 기기에서 희미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존자… 집결지… ‘강철의 도시’로… 안전한… 피난처….”

서진의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었다. 인간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할까? 하지만 카르는? 카르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괴물일 뿐이었다.

“가야 해?” 카르가 서진의 불안한 마음을 읽은 듯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짧은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난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카르의 눈빛에 깊은 기쁨이 스쳤다. 그는 서진의 손을 꽉 잡았다. “함께.”

그들의 결정은 시험대에 올랐다. 다음 날, 서진과 카르가 함께 사냥을 나섰을 때였다. 그들은 인간 무리에게 발각되었다. 낡은 총을 든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들을 포위했다.

“저것 봐! 괴물이다! 그리고… 저 여자는 대체 뭐야? 괴물과 함께 다니잖아!”

“괴물에게 홀렸군! 잡아서 불태워야 해!”

총구가 그들을 향했다. 카르는 서진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의 비늘 돋은 등은 그녀의 방패가 되었다. 그의 눈동자는 맹렬한 분노로 타올랐다. 숲의 아이의 본성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카르, 안 돼! 싸우지 마!” 서진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카르는 서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순간 흔들렸다. 그들을 해치려는 인간에 대한 분노와 서진을 지키려는 본능, 그리고 서진의 만류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었다.

총성이 울렸다. 남자들이 발포했다. 카르는 엄청난 속도로 몸을 던져 서진을 보호했다. 총알이 그의 어깨를 스쳤다. 붉은 피가 그의 푸른 비늘을 타고 흘러내렸다.

“카르!” 서진은 비명을 질렀다.

카르는 고통스러워했지만, 그들을 향한 눈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낮은 으르렁거림과 함께 땅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의 움직임은 번개처럼 빨랐다. 총을 든 남자들은 그의 속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카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들을 위협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그저 무장 해제시키고 도망치게 만들었다.

남자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자, 카르는 쓰러졌다. 그의 어깨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서진은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 그의 상처를 살폈다.

“이 바보! 왜 싸우지 않은 거야! 죽일 수도 있었잖아!”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카르는 고통 속에서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너… 싫어… 피….” 그는 서진이 살인을 싫어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서진은 그의 상처를 자신의 옷 조각으로 지혈했다. “바보… 진짜 바보….” 그녀는 카르의 얼굴에 흐르는 빗물과 땀을 닦아주었다.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그녀를 향한 깊은 사랑과 슬픔, 그리고 결단이 담겨 있었다.

“우리… 어디로든 가자.” 서진은 말했다. “이곳을 떠나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는 곳으로.”

카르는 서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애썼다. 서진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비는 그칠 줄 몰랐지만, 그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따뜻했다.

“어디든… 너와 함께라면.” 서진의 목소리는 비바람 속에 묻혔지만, 그 의미는 카르에게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빗속을 걸었다. 숲의 깊은 곳으로, 아무도 찾지 못할 은신처를 찾아. 그들의 발자국 뒤로, 낡은 세계의 잔해와 새로운 세계의 서러움이 뒤섞인 비가 계속 내렸다. 종족과 종족 사이에 놓인 금지된 경계는 허물어졌고, 그 자리에는 오직 두 존재의 순수한 사랑만이 남아,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 속에서 작은 불씨처럼 타올랐다. 그것은 살아있는 한, 결코 꺼지지 않을 불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