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화: 그을린 덫, 비상하는 그림자】
기름과 그을린 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금 전 굉음이 귓속을 때린 뒤에도 희미한 이명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겨우 몸을 일으킨 메아리는 비틀거리는 시야로 주위에 널브러진 동지들의 얼굴을 훑었다. 제국군의 철갑병 잔해들이 증기를 내뿜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황제군의 하급 기계병들은 강하진 않아도 숫자가 만만찮았다. 겨우 한숨 돌리려는 찰나, 저 멀리서 다시 진동이 느껴졌다. 땅이 울리고, 낡은 주석 지붕 위로 먼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메아리님, 무사하십니까!”
젊은 기계공 시온이 손때 묻은 고글을 이마 위로 올리며 뛰어왔다. 얼굴엔 기름때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두 눈은 놀랍도록 또렷했다.
“이 정도쯤이야. 다른 녀석들은?”
메아리는 허리에 찬 증기 권총의 과열된 총열을 식히며 물었다.
“몇 명 다쳤지만, 큰 부상은 없습니다. 보급창은 접수했습니다! 생각보다 저항이 약했습니다. 이게… 뭔가 이상합니다.”
시온의 목소리엔 뿌듯함과 동시에 묘한 불길함이 서려 있었다. 너무나 쉽게 얻은 승리는 때로 더 큰 함정의 전조가 된다. 메아리는 시온의 불안감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제국 변경의 오래된 증기 보급창. 반란군에게는 목마른 사막의 샘물과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제국이 쉽게 내어줄 리 없는 요충지였다.
“그림자는?”
메아리가 묻자, 보급창 천장의 낡은 톱니바퀴 위에서 까마귀처럼 기다리던 그림자가 조용히 내려왔다.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는 사냥꾼 같았다. 그는 말이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언제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보급창 안쪽을 확인했습니다.” 그림자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고 건조했다. “무기고는 텅 비었고, 식량 창고는 쥐떼나 겨우 먹을 만한 폐기 직전의 것들뿐입니다. 하지만… 지하에 봉인된 격납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림자가 건넨 손전등 불빛 아래, 낡은 양피지 지도가 펼쳐졌다. 지도는 이 보급창의 구조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었고, 가장 깊숙한 곳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특급 봉인’ 구역이 눈에 띄었다.
“봉인? 제국이 텅 빈 창고에 이런 요새 같은 봉인을 할 리가 없는데.” 시온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함정이다.” 메아리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우리가 이곳을 노릴 걸 알고, 일부러 미끼를 던진 거야.”
그 순간, 멀리서 들리던 진동이 급격히 커졌다.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 아래를 뒤따르는 셀 수 없는 철갑병들의 행렬. 제국의 주력 공중 전함, ‘천둥매’가 수십 대의 추격 비행정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축을 뒤흔드는 철갑병들의 발소리는 수천 개의 망치가 땅을 때리는 소리와 같았다.
“젠장, 전 병력이다! 제국군 주력 부대야!” 한 반란군 병사가 망루에서 비명을 질렀다. “매복입니다! 완벽한 매복이에요!”
메아리는 이를 악물었다. 보급창을 손에 넣었다는 허울뿐인 승리에 잠시나마 안도했던 자신이 뼈저리게 후회스러웠다. 제국은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일단 지하 격납고로!” 메아리가 소리쳤다. “뭘 심어놨든, 일단 확인해야 해!”
반란군 병사들은 혼란 속에서도 메아리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낡은 철문을 부수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습하고 어두운 지하 통로는 희미한 증기 램프 불빛에 의존해야 했다. 마침내 나타난 ‘특급 봉인’ 구역은 견고한 강철문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문에는 거대한 자물쇠가 여러 개 채워져 있었고, 복잡한 증기 압력 회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건… 그냥 보급품 창고가 아니야.” 시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 정도 보안이라면, 기밀 시설이거나… 정말 위험한 게 있을 겁니다.”
시온은 능숙하게 도구를 꺼내들어 자물쇠와 압력 회로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손놀림은 정확하고 빨랐지만, 그 과정에서 흐르는 식은땀은 그가 느끼는 압박감을 짐작하게 했다. 밖에서는 공중 전함의 포격 소리가 울리고, 지상에서는 철갑병들의 진격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병사들의 보고가 끊이지 않았다.
“서둘러!” 메아리가 초조하게 외쳤다.
몇 분이 지나자, 거대한 강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안에서는 차가운 금속 냄새와 함께 섬뜩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내부는 예상과 달리 텅 비어 있었다. 거대한 공간 한가운데, 오직 하나의 장치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심장처럼 규칙적으로 푸른빛을 깜빡이는 복잡한 기계였다. 수많은 구리 관과 증기 밸브,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전선들이 엉켜 있었고, 중심에는 거대한 수정 구슬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시온이 경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메아리는 직감적으로 오싹함을 느꼈다. 저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여태껏 제국의 어떤 무기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림자가 기계 옆의 작은 패널을 발견하고 능숙하게 열었다. 안에는 수많은 도면과 함께 낡은 기록 장치가 있었다. 그는 기록 장치를 재생했고, 메마른 제국 기술자의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1차 실험 성공. 코드명 ‘정화 증기포’. 유기 생명체만 선택적으로 증발시키고, 구조물은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확인됨. 목표 지역 ‘외곽 슬럼’ 설정. 예상 완료 시간 24시간. 황제 폐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기술자의 목소리는 중간에 끊겼지만, 그 내용은 명확했다. ‘정화 증기포’. 유기 생명체만 선택적으로 제거하고, 건물은 그대로 보존하는 무기. 제국이 우리 반란군을, 아니, 제국의 눈에 거슬리는 모든 평민들을 ‘정화’하려 하고 있었다. 슬럼가의 수많은 목숨들이 단 24시간 안에 연기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세상에…” 시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건 학살 병기야… 전 인류를 상대로 한…”
메아리는 차가운 분노에 휩싸였다. 제국은 보급창 미끼로 우리를 유인하고, 그 사이에 이 살인 병기를 작동시켜 도시를 ‘정화’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될 즈음에는 이미 늦어버리는 상황.
밖에서는 포격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고, 강철문의 육중한 굉음이 지하 공간을 울렸다. 제국군이 침입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시온!” 메아리가 결심한 듯 소리쳤다. “이걸 멈출 수 있어?”
시온은 거대한 정화 증기포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빛은 불안했지만, 동시에 기계공 특유의 도전적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멈추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미 원격으로 작동되고 있고, 제국의 중앙 통제와 연결되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만약 이 에너지원을 역이용할 수 있다면… 방향을 바꾸거나… 아니, 아예 이 에너지를 폭주시켜서…!”
시온의 말은 점점 더 격양되었지만, 메아리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 무기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자폭과 다름없을 것이다.
“어떻게 할 생각인데?” 메아리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저희가 훔쳐온 제국군 수송 비행정, 기억하십니까? 거기에는 증기 출력 가속 장치가 달려있습니다. 만약 그걸 이 정화 증기포에 연결해서… 에너지 출력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면… 폭발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작업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폭발 범위가…!”
시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거대한 기계가 폭발한다면, 이곳 보급창은 물론, 이 근처의 반란군 병사들까지 모두 희생될 것이다.
메아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수많은 동지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죽음을 알면서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림자.” 메아리가 나지막이 불렀다. “지금부터 모든 병력을 외부로 대피시켜. 비행정을 준비시켜. 시온의 계획을 실행한다.”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지만, 메아리는 그의 눈빛에서 깊은 연민을 읽었다.
“메아리님은…!” 시온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내가 남겠다.” 메아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폭발 장치를 연결하고, 이곳에 남아서 마지막까지 제국군을 막을 거다. 너는 비행정을 타고, 무사히 탈출해. 그리고 이 사실을, 제국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안 됩니다! 메아리님 없이 어떻게…!” 시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명령이다, 시온.” 메아리는 시온의 어깨를 잡고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지만,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살아남아라. 그리고 우리의 꿈을 이어가라. 너는 우리의 희망이다.”
지하 격납고의 철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제국군 철갑병들의 발소리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음과 뒤섞였다. 시간이 없었다.
“자, 서둘러! 너희는 나가! 나갈 준비를 해!” 메아리는 남은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시온은 주저했지만, 메아리의 결연한 눈빛에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는 서둘러 필요한 장비들을 챙겨들고, 폭발 장치를 연결하기 위해 정화 증기포에 다가갔다. 메아리는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을 믿고 따라온 동지들, 그리고 이제 곧 증발할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허리춤에서 낡은 증기 권총을 꺼내 들었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제국의 압제에 맞선 평민들의 외침이 될 것이었다. 비록 이곳에서 쓰러진다 해도, 그의 마지막 외침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 제국의 심장을 관통할 것이었다.
지하 통로 끝에서, 제국군 철갑병들의 붉은 눈이 섬광처럼 번득였다.
“와라, 제국 놈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아느냐!”
메아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거대한 정화 증기포 안에서 시온이 연결한 증기 출력 가속 장치가 격렬한 소리와 함께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이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번뜩이며, 기계 전체를 뒤흔들었다. 모든 것이 폭발 직전이었다.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비록 쓰러진다 해도, 그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었다. 이 죽음은 제국에 맞선 거대한 반란의 불씨를 지피는 마지막 불꽃이 될 것이었다.
메아리는 증기 권총을 굳게 잡고, 달려오는 제국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