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우주가 하윤의 눈동자에 투영되었다. 망망한 암흑 속에서 수많은 별들이 차가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함선, ‘별똥별’은 테란 연합의 최전방 정찰기였다. 그들은 수십 년간 미지의 성운, ‘제니스 네뷸라’의 경계를 맴돌았다. 연합은 그곳에 존재하는 희귀 에너지 결정에 눈독을 들였고, 자이로스 종족은 그곳을 자신들의 성스러운 발원지로 여겼다. 양측의 팽팽한 긴장감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함장님, 제니스 네뷸라 내부에서 감지되는 에너지 신호가… 심상치 않습니다.” 부조종사 미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하윤은 모니터의 붉은 경고창을 응시했다. “이상 신호인가, 아니면… 자이로스족의 경고인가?”
그 순간, 함선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굉음과 함께 경고음이 찢어질 듯 울렸다.
“방어막이… 관통되었습니다! 엔진 출력 급감!”
“젠장! 대체 뭘로 공격한 거지? 미아, 탈출정 준비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함선은 통제 불능 상태로 심연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 하윤은 자신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푸른 섬광을 보았다. 마치 살아있는 별빛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하윤은 차가운 암석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파손된 헬멧 사이로 들어오는 공기는 으스스하게 차가웠지만, 동시에 상쾌하고 이질적인 향을 풍겼다. 그녀의 눈앞에는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결정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액체가 아닌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밤하늘처럼 어두운 행성의 상공에는 무수히 많은 소행성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고, 그 사이로 빛의 강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살아남았군, 테란.”
갑자기,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하윤의 머릿속에 울렸다. 물리적인 소리가 아닌, 생각 자체가 전달되는 듯한 감각이었다. 하윤은 떨리는 손으로 옆구리에 찬 블래스터를 움켜쥐었다.
그때, 빛의 숲 사이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것은 형체가 불분명한 존재였다. 반짝이는 푸른빛과 은빛이 뒤섞인 유기체 결정체 같기도 했고, 부드럽게 흐르는 에너지 같기도 했다. 투명한 몸 안에는 무수한 빛의 섬유들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아른거렸다.
“누구… 냐. 네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가?” 하윤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네 함선은 추락했고, 행성이 너를 받아들였다. 나는 너의 의식을 붙잡아 생명을 유지시켰을 뿐.” 빛의 존재가 다가왔다. 하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카엘이다. 이 행성의 드리머 중 하나.”
드리머. 자이로스 종족의 영적 지도자이자, 행성의 에너지를 조율하는 존재들. 그들은 테란 연합의 가장 큰 적이자, 미지의 존재였다.
“테란은… 자이로스족의 적이다. 왜 나를 살린 거지?” 하윤이 물었다.
카엘은 하윤의 눈을, 혹은 그녀의 내면을 응시하는 듯했다. 카엘에게는 물리적인 눈이 없었다. 그저 빛이 아른거릴 뿐이었다. “너의 의식에서… 갈등이 느껴졌다. 너는 파괴만을 바라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윤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그저 임무에 충실한 병사였을 뿐인데.
며칠 밤낮, 카엘은 하윤을 보살폈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카엘은 자신의 빛을 하윤의 몸에 흘려보냈다. 그럴 때마다 하윤의 몸속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에너지로 채워지는 듯했다. 카엘은 하윤에게 이 행성의 언어를, 아니, ‘생각’을 가르쳤다. 빛의 강물은 행성의 피였고, 거대한 결정 숲은 그들의 신경망이었다. 모든 것이 살아있고 연결되어 있었다. 테란의 우주관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하윤은 카엘에게 테란의 별들을, 끝없이 확장하려는 연합의 욕망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욕망이 가져온 수많은 갈등과 파괴를 털어놓았다. 카엘은 말없이 들어주었다. 그는 빛으로 하윤의 손을 감쌌다. 카엘의 몸은 차갑지만, 그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존재 자체가 품고 있는 깊은 이해와 평화가 하윤의 마음을 조금씩 녹였다.
“우리는… 너무나 다르다.” 하윤이 중얼거렸다. “탄소 기반 생명체와 에너지 기반 생명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차이는… 불화의 씨앗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연결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카엘의 생각이 하윤의 머릿속에 부드럽게 울렸다. 그의 빛나는 형체가 하윤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너의 내면에는… 이 행성의 고요함이 스며들고 있다. 그리고 너의 따뜻함이… 나의 빛을 흔든다.”
그 순간, 하윤은 카엘의 투명한 몸 속에서 빛의 섬유들이 더 격렬하게 아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심장도 쿵, 하고 울렸다. 카엘의 빛나는 형체에 손을 뻗었다. 차가운 듯 부드러운 감촉. 마치 살아있는 얼음을 만지는 듯했다.
“금지된 일이야.” 하윤은 스스로에게 경고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이 이질적인 존재에게 깊이 이끌렸다.
어느 날, 행성의 상공에 새로운 불빛이 나타났다. 테란 연합의 구조 신호였다. 대규모 함대가 하윤의 조난 신호를 추적해 이 금지된 구역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다.
“그들이… 왔다.” 하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제 너희는… 이곳에서 도망쳐야 해. 그들은 파괴할 거야, 카엘. 모든 것을.”
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빛나는 몸이 흔들렸다.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이곳은 우리의 근원이다. 너는… 너의 동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하윤은 카엘의 빛나는 손을 붙잡았다. “나는 너를 두고 갈 수 없어. 그들이 너를 해칠 거야.”
“너의 동족은… 너를 찾고 있다. 그들에게 돌아가라, 하윤. 그리고 기억해라. 이곳에… 너를 아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카엘의 목소리에 슬픔이 서려 있었다. 하윤은 그의 빛나는 몸에서 처음으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감지했다.
하윤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테란의 함대는 이미 대기권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굉음이 행성 전체를 뒤흔들었다.
“안 돼…!” 하윤은 소리쳤다. 그녀는 돌아섰다. 카엘에게, 그의 빛나는 몸에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나는… 나는 너를 버릴 수 없어, 카엘.”
카엘은 한 걸음 물러났다. “너는 너의 길을 가야 한다, 하윤.”
“내 길은… 어디지? 내 동족에게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세계에 완전히 속할 수 없을 거야. 너를 본 이상… 이곳을 경험한 이상… 나는 달라졌어.” 하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와 함께 가줘, 카엘. 어디든.”
카엘은 하윤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빛나는 몸에서 희미하게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생각이 하윤의 마음에 강력하게 울렸다.
“너의 선택이… 너의 운명을 바꿀 것이다, 하윤.”
그 순간, 거대한 테란 순양함의 탐조등이 빛의 숲을 꿰뚫고 하윤과 카엘의 모습을 비췄다. 비상 착륙정이 착륙하는 굉음과 함께 테란 병사들이 무장을 갖춘 채 쏟아져 나왔다.
“강하윤! 응답하라! 여긴 테란 연합 구조팀이다!”
하윤은 병사들의 거친 외침과 번쩍이는 탐조등, 그리고 그들의 무기가 향하는 곳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당연히 이질적인 빛의 존재, 카엘에게 향해 있었다. 카엘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빛나는 몸은 병사들의 총구 앞에서 더 없이 연약해 보였다.
하윤은 천천히 카엘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카엘의 빛나는 손을 잡았다. 카엘의 몸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것은 더 이상 차가운 얼음이 아니었다.
“나는… 너와 함께 갈 거야, 카엘.” 하윤은 힘주어 말했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어디든, 너의 빛이 닿는 곳이라면.”
테란 병사들이 경악과 분노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무기가 불을 뿜으려 했지만, 하윤은 카엘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등 뒤로, 자이로스 행성의 거대한 결정 숲이 빛을 발하며 새로운 운명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금지된 사랑은, 이제 막 우주를 가로지르는 첫걸음을 내딛으려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