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낯선 칼날 아래**
용비각(龍飛閣)의 비무대(比武臺)는 거대한 용의 턱처럼 버티고 섰다. 겹겹이 쌓인 관중석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했고, 무수히 꽂힌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우레 같은 함성을 증폭시켰다. 이 땅의 운명을 건 천무대회(天武大會). 그 무게는 강휘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강휘는 제 차례가 아님에도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 여기가 대체 어디인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는 PC방에서 최신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펼쳐진 것은 게임 속에서나 볼 법한 기와집과 상투를 튼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섬뜩한 살기가 오가는 비무대였다.
“크아악!”
그의 눈앞에서 한 무림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그대로 비무대 바닥에 처박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고통에 찬 신음이 이어졌다. 승자 쪽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다음!”
강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게 진짜 무공이라고? 영화에서나 보던 와이어 액션이 아니라? 내공을 싣는다는 주먹질 한 방에 돌기둥이 부서지고,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는 쇠가루가 튀는 듯 날카로웠다. 그는 이곳에 온 뒤로 줄곧 혼란과 공포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자신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리고 왜 자신이 이 지옥 같은 비무대 한가운데 서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천하의 운명’이라는 말이 온 문파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이 대회에 ‘참가자’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뿐.
그때, 그의 옆에 서 있던 한 노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희끗희끗한 수염에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형형했다.
“저것이 바로 백 년 만에 펼쳐지는 마교(魔敎)의 ‘혈마겁(血魔劫)’을 막기 위한 천무대회의 진면목이니라. 패배는 죽음이며, 죽음은 이 강호의 멸망을 뜻하지.”
강휘는 노인을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제가 여기 왜 있는 건지는 아세요?”
노인은 강휘를 한참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지. 자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하구나. 하지만 운명은 묘한 법. 어쩌면 자네가 바로 이 난세를 구할 한 줄기 빛일 수도 있겠지.”
빛? 강휘는 코웃음이 나왔다. 그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컴퓨터 게임이나 좋아하고, 퇴근하면 드라마나 보면서 맥주 한 캔 따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그런 자신에게 천하의 운명이라니, 헛소문이겠지.
“다음 참가자, 개화문(開花門)의 강휘(康輝)!”
이름이 불리자마치 비무대 주변의 웅성거림이 삽시간에 멎었다. 수많은 시선이 일제히 강휘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의심과 호기심,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개화문이라는 문파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 문파의 옷을 입고 이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발악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버거웠다.
‘내가? 내가 저기 나가서 뭘 어쩌라고? 맨손으로 싸우라고? 아니, 애초에 나는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데!’
노인이 그의 등을 툭 두드렸다. “기죽지 말거라.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법. 자네의 강한 의지가 곧 검이 될 것이니.”
강휘는 억지로 발을 떼 비무대로 향했다. 흙먼지 흩날리는 비무대 중앙에 서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마치 수십 개의 칼날처럼 온몸을 꿰뚫는 것 같았다.
그의 맞은편에는 중년의 무사가 서 있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에 두툼한 철갑을 두르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한눈에 봐도 엄청난 무게가 느껴지는 대검이 걸려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맹렬한 짐승 같았고, 얼굴에는 오랜 세월 전장에서 구른 듯한 흉터가 가득했다. 그의 등 뒤로 걸린 깃발에는 ‘철혈문(鐵血門)’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어린놈이군. 비무대에 오를 만한 내력도 없어 보이는구나.” 철혈문의 무사는 강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비웃듯이 말했다. “이곳은 네놈의 놀이터가 아니다. 어서 물러나거라. 목숨을 구걸할 마지막 기회다.”
강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입술은 바싹 마르고,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하지만 저 수많은 눈동자 앞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한 수모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젠장, 젠장, 젠장! 망할 타임슬립!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이런 미친 무림 시대냐고!’
그는 온 힘을 다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도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준비… 시작!”
심판의 외침과 동시에 철혈문의 무사가 대검을 뽑아 들었다. 허공을 가르는 묵직한 바람 소리가 강휘의 귓전을 때렸다. 거대한 대검이 그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마치 통나무가 떨어지는 듯한 끔찍한 속도였다.
강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옆으로 던졌다. 쿵! 그의 바로 옆 비무대 바닥이 움푹 패이며 먼지가 폭발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일어섰다. 눈앞이 아찔했다. 죽을 뻔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대검이 박혀 있었다.
“흐음? 피했느냐?” 철혈문의 무사는 살짝 놀란 듯 눈썹을 치켜떴지만, 이내 다시 비웃음을 흘렸다. “제법 놀라움도 아는군. 하지만 그것이 끝이다.”
이번에는 대검이 수평으로 휘둘러졌다. 강휘는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쇠뭉치를 보며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사의 다리였다. 두껍고 단단했지만, 움직임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위.
‘저 다리! 저 다리를 치면 균형을 잃을 거야!’
그는 이 세계의 무공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현대 물리학적 지식은 머릿속에 가득했다. 거대한 힘에는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이 따르기 마련. 무사가 칼을 휘두르는 순간, 그의 몸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강휘는 무사가 대검을 휘두르는 관성을 이용해 그의 팔꿈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무사의 중심이 되는 왼쪽 다리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그것은 결코 무공의 초식이 아니었다. 그저 길거리 싸움에서나 나올 법한 비겁하고 무례한 발길질이었다.
“크억?!”
철혈문의 무사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움찔했다. 대검을 휘두르던 그의 상체가 순간적으로 멈칫했고, 중심을 잃은 그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완벽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그의 자세를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강휘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무사의 몸통으로 달려들어 어깨를 들이받았다. 강력한 충격이 전해졌고, 철혈문의 무사는 뒤로 한두 발자국 물러섰다. 비무대의 모래먼지가 한차례 더 솟구쳐 올랐다.
관중석에서는 술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비웃음과 경멸의 시선은 놀라움과 혼란으로 바뀌었다.
철혈문의 무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네놈… 대체 무슨 괴상망측한 초식이냐!”
강휘는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너무 아팠다. 어깨를 들이받은 충격으로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해 보이는 무사를 잠시나마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그때, 그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아주 먼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혹은 아주 가까이서 속삭이는 것처럼.
*‘…균열… 틈새… 그의 흐름을 읽어라…’*
강휘는 고개를 흔들었다. 환청인가? 하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명확하게 들려왔다.
철혈문의 무사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강휘를 노려보았다. “그래, 이놈! 네놈의 몸속에 잠든 ‘그것’을 내가 직접 끄집어내 주마!”
그는 대검을 크게 휘두르며 다시 강휘에게 돌진했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살기가 느껴졌다. 마치 비무대가 아니라 진짜 전장에서 적을 도륙하려는 듯한 맹렬한 기세였다. 강휘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몸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치 고통을 잊게 하고 힘을 샘솟게 하는 마법 같은 에너지 같았다.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강휘는 몸속에서 솟구치는 알 수 없는 기운을 믿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정면으로 무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눈앞에서 거대한 대검이 번뜩였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칼날의 섬광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의 무모한 도약이 이 천무대회, 그리고 강호의 운명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