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돌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수천 년 된 암반으로 이루어진 동굴의 내부는 습기와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이제 카인의 시야는 그것마저 꿰뚫을 수 있었다. 그의 몸을 감싸던 마지막 검은 마력의 파동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자, 동굴의 입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찢어진 로브 자락을 흔들었다.
3년.
레온에게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는 제 목숨마저 불확실했던 폐허의 구렁텅이에서 이 멸망의 황야까지. 오직 복수 하나만을 위해 숨죽여 살아온 시간이었다. 이 썩어 문드러진 바위굴 속에서, 그는 저주받은 고대 마법을 파고들었고, 망자의 심장을 제 것처럼 다루는 끔찍한 권능을 손에 넣었다.
카인은 손을 들어 올렸다.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 끝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라 마치 살아있는 연기처럼 춤을 추었다. 이 힘은 과거 실버레인 왕국의 수호 기사였던 그가 결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빛과 정의를 맹세했던 기사의 맹세는 레온의 칼날에 부서졌고, 그 파편은 카인의 심장에 박혀 검은 독을 뿜어냈다.
“…레온.”
나직이 읊조린 이름에 동굴 전체가 공명하는 듯했다. 그 이름은 카인의 피를 다시 끓어오르게 만드는 주문과도 같았다. 친구라고 불렀던 자. 형제보다 더 가까웠던 자. 실버레인 왕국의 황태자이자, 자신의 유일한 벗. 그 모든 수식어는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그날 밤.*
레온의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미안하다, 카인. 하지만 왕국을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 말과 함께 뒤에서 꽂힌 칼날의 감촉은 아직도 생생했다. 심장을 꿰뚫지는 못했지만, 척추를 깊숙이 파고든 칼날은 빛의 마법과 영원히 단절시켰다. 그리고 그 위에 뿌려진 맹독은 그를 서서히 죽음으로 이끌었다. 카인은 절규했다. 배신감에, 고통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잃었다는 절망감에. 하지만 레온은 뒤돌아선 채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엔 카인의 피만 흥건했다.
쓰읍-.
카인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폐부 깊숙이 스며든 냉기가 식어버린 그의 분노를 다시 일깨웠다. 과거의 환영은 희미해졌지만, 그날의 기억은 그의 심장에 새겨진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젠 더 이상 빛의 마법을 다룰 수 없었다. 순수한 영혼만이 다룰 수 있다는 신성 마법은 이미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그의 영혼은 너무나 오랫동안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툭. 툭.
어둠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멸망의 황야 깊숙한 곳. 이곳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저주받은 땅이었다. 하지만 최근 레온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수하들이 이 외곽 지역까지 탐색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카인은 제법 깊숙한 동굴 안에 몸을 숨겼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주변에서 꿈틀대는 검은 기운은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이자, 모든 생명을 움켜쥘 수 있는 힘이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이 거지 같은 황야에 도대체 뭘 찾으라고 온 거야?”
거친 목소리가 동굴 입구에서 들려왔다. 뒤이어 두어 명의 그림자 무리가 어둠을 헤치고 들어섰다. 레온의 근위병들이었다. 그들의 갑옷에는 실버레인 왕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카인의 눈에는 그저 타락한 광경으로만 비쳤다.
“대장님은 혹시 ‘어둠의 잔재’를 찾는 걸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이 근방에서 수상한 마력 반응이 감지됐다고.”
다른 병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둠의 잔재. 카인이 얻은 힘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금지된 마법이자,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끔찍한 저주였다.
카인은 그림자 속에 녹아들었다. 병사들의 시선은 여전히 동굴 안쪽의 어둠을 뚫으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카인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카인은 이미 그림자 그 자체가 되어버렸으니까.
“으아악!”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선두에 섰던 병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의 목덜미에는 검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그의 눈은 공포에 질려 튀어나올 듯했다.
“뭐… 뭐야!?”
뒤따르던 병사들이 당황하여 검을 뽑았다. 하지만 그들이 반응할 새도 없이,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 촉수들이 그들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꾸우욱-!
그림자는 뱀처럼 병사들의 몸을 휘감았고, 순식간에 그들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발버둥 쳤지만, 그림자는 점점 더 조여들 뿐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퍼렇게 질려갔고,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의 비명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쳤다.
“이… 이럴 수는… 읍!”
마지막 병사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림자 촉수들이 그들의 온몸에서 생기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병사들의 몸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며 미라처럼 변해갔다. 그들의 눈빛은 아직 생생한 공포를 담고 있었지만, 그들의 육체는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지 오래였다.
카인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은 핏빛으로 번뜩였고,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레온… 네가 찾는 ‘어둠의 잔재’는 바로 너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깃들어 있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
그는 바싹 마른 병사들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빛나는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손아귀에 쥐어진 힘은 과거의 어떤 마법보다 강력했다. 이 힘은 그를 집어삼키는 동시에, 그의 복수를 위한 완벽한 도구가 되어주었다.
카인은 동굴 입구로 향했다. 황야의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의 눈앞에는 실버레인 왕국의 수도, ‘찬란한 왕궁’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찬란한 왕관을 쓰고,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왕좌에 앉아 있을 레온이 있었다.
“기다려라, 레온. 네가 쌓아 올린 찬란한 성은 곧 내가 부서뜨릴 것이다. 너의 왕국은 잿더미가 될 것이고, 네가 앉아 있는 왕좌는 피로 물들 것이다. 그리고… 너의 목숨은 나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찢겨 나갈 것이다.”
카인의 그림자가 황야의 석양 아래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는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의 형상과도 같았다.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복수를 향한 그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