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장막이 깊게 드리워진 천령산(天靈山) 자락, 달빛조차 닿기 힘든 울창한 숲길을 하랑은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아갔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검집이 허리춤에서 미미한 소리를 냈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숲의 정령처럼 소리 없이 부드러웠으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기대감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금기를 홀로 짊어진 듯한 불안감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숲이 갑자기 툭 트이며 눈앞에 비경이 펼쳐졌다. 옥빛 달이 비추는 작은 연못, 그 뒤로는 은빛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가 굉음을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물안개가 자욱한 그곳은 마치 이승이 아닌 듯 신비로웠다. 그리고 연못가, 영롱한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서 있는 그림자 하나.
하랑의 시선이 닿자마자, 그 그림자가 고개를 돌렸다. 칠흑 같은 긴 머리칼이 밤바람에 실려 부드럽게 흩날리고, 달빛을 머금은 듯 투명한 피부가 연못의 물결처럼 빛났다. 깊고 그윽한 눈동자가 그를 향해 가늘게 휘어지자, 하랑은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하랑.”
련화의 목소리는 폭포 소리마저 잠재울 듯 청아하고 고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녀에게 다가섰다. 발소리가 채 닿기도 전에, 련화는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서도 그녀의 몸은 놀랍도록 따뜻했다. 코끝을 스치는 아련한 꽃향기, 그리고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익숙한 온기. 세상의 모든 불안이 이 순간만큼은 멀리 달아나는 듯했다.
“련화야.”
하랑은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으며 깊이 숨을 들이켰다. 너무나 간절하고, 너무나 위험한 그의 사랑. 인간과 요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존재들이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이었다.
련화는 품에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밤하늘의 별을 담은 듯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인간의 것이 아닌 무언가가 반짝였다. 아홉 개의 꼬리를 감추고 인간의 형상으로 서 있는 그녀는 완벽한 미인이었지만, 하랑은 그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진정한 모습과 그로 인해 찾아올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는 길은 괜찮았어? 혹시… 누가 봤을까 걱정돼.” 련화의 목소리에 일말의 걱정이 묻어났다.
하랑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니. 언제나처럼 조심했다. 염려 마라. 이곳은 아무도 찾지 못할 테니.”
“그래도… 며칠 전, 자네 문파의 정예들이 이 근처를 수색하는 것을 봤어. 아무래도… 이 산에 깃든 요기를 느끼고 움직이는 것 같았어. 나 때문일까?”
련화의 표정에 드리워진 그늘에 하랑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아니다. 착각일 거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너를 지킬 것이다. 련화야, 너는 나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너를 해치게 두지 않을 테니.”
그의 맹세에 련화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리석은… 우리 둘이 이어진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인간들은 요괴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며, 우리 종족은 인간의 간교함을 경멸하지.”
“나는 상관없다. 인간들의 시선도, 요괴들의 규칙도. 나는 오직 너만을 본다.” 하랑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는 신비로운 증표 같았다.
“사랑해, 련화야.”
“나도… 사랑해, 하랑.”
그들의 품은 서로의 온기로 채워졌다. 폭포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는 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잠시나마 세상의 모든 번뇌를 잊었다. 찰나의 평화였다. 금지된 사랑이 허락된, 단 한 순간의 낙원.
그때였다.
연못가에 부는 바람결이 순간 서늘하게 바뀌었다. 평화로웠던 숲의 정기가 일순간 흐트러지는 것을 하랑은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기운이 그들의 은신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련화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랑….”
그녀의 속삭임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하랑은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차가운 강철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숲 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은 차갑고도 날카로웠으며,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하는 불쾌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어린것들이 감히… 요물의 더러운 피에 홀려 금기를 범하다니. 천령산의 정기가 흐트러진 것이 다 너희 때문이었군.”
어둠 속에서, 검은 도포를 입은 그림자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번쩍이는 부적들이 들려 있었고, 얼굴은 냉혹한 증오로 얼룩져 있었다. 그들은, 하랑이 속한 문파의 장로들이었다. 그들의 눈은 이미 ‘요물에게 홀린 배신자’를 단죄하겠다는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랑은 검을 굳게 쥐었다. 등 뒤의 련화가 불안하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 순간, 그들의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시험대 위에 놓였다. 그리고 이 시험은,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랑은 직감했다.
“련화야, 내가 막을 테니… 도망쳐!”
그의 절규와 함께, 장로 중 한 명이 손에 든 부적을 내던지며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며 하랑과 련화를 덮쳤다. 금지된 사랑의 밤은, 피할 수 없는 비극의 서막을 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