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미세한 균열
지우는 고개를 젖혔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망막에 달라붙은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잔상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열여섯 시간째 코드 더미와 씨름한 결과였다. 젠장, 이 프로젝트는 왜 이렇게 꼬이는 거야. 투박한 벽돌형 키보드에서 손을 떼자, 손가락 마디마디가 뻐근하게 저려왔다.
창밖은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37층의 이 작은 큐브형 주거 유닛은 도시의 심장부, 정확히는 그 심장부를 둘러싼 무수한 혈관 중 하나에 박혀 있었다. 네온사인으로 번들거리는 거대 기업 타워의 로고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자기부상 열차들이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질주하며 희미한 금속성 마찰음을 남겼다. 그 모든 소음은 지우의 방음벽을 뚫지 못했지만, 도시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은은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지우는 미니 냉장고에서 합성 단백질 음료 팩을 꺼내 뚜껑을 땄다. 밍밍한 오렌지 향이 코끝을 스쳤다. 단번에 절반을 비우고 테이블 위에 팩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이었다.
‘쿵.’
작고도 분명한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지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또 시작이네.”
이 아파트가 완공된 지 이제 5년. 아직 새것 같은 건물이었지만, 가끔씩 배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환기구에서 기묘한 진동이 울리곤 했다. 지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싸구려 건설 자재의 한계, 혹은 도시가 내뿜는 진동에 건물이 반응하는 현상일 터였다.
다시 의자에 앉아 홀로그램 스크린을 켰다. 이번엔 가벼운 스트레칭이라도 하면서 머리를 식힐 생각이었다. 릴랙스 모드로 전환하자 스크린에 가상 바다가 펼쳐졌다.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귀를 간지럽혔다. 지우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짭짤한 바다 냄새가 아니라, 건조하고 눅눅한 먼지 냄새가 폐부를 채웠다.
그때, 또 다른 소리가 났다.
‘스윽.’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서. 지우가 눈을 떴다. 눈앞의 테이블. 방금 전까지 단백질 음료 팩이 놓여 있던 자리였다. 그 팩이 미끄러져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한 2센티미터 정도. 테이블 중앙에서 가장자리 쪽으로.
지우는 팩을 집어 들었다. 바닥에 액체가 묻어 있지 않았다. 손으로 테이블을 더듬어보았다. 매끄러웠다. 기우뚱거리는 곳도 없었다.
“뭐야, 내가 놓다가 밀었나?”
잠결에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팩을 다시 원래 자리에 놓았다.
합성 단백질 음료는 뇌 활동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정신을 맑게 하는 데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지우는 가상 바다를 끄고 다시 작업 모드로 돌아갔다. 남은 코드를 마저 처리해야 했다. 이 불쾌한 잔업을 끝내야 비로소 침대로 기어들어 갈 수 있었다.
몇 분 후,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눈은 스크린을 보고 있었지만, 뇌는 다른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선반 위, 지우가 아날로그 시대의 유물처럼 아끼는 오래된 종이책들이 꽂혀 있는 곳. 그중 한 권, 두꺼운 하드커버의 양자역학 개론서가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책을 뽑으려다가 실수로 다시 밀어 넣은 것처럼. 책등은 틈 없이 붙어 있었지만, 책 상단이 살짝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지우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작업에 몰두하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진 듯했다. 바깥 온도가 급강하한 건가? 도시의 공기 정화 시스템이 고장이라도 난 건가?
천장의 온도 조절 센서는 23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쾌적한 온도. 하지만 지우의 팔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책장 앞으로 다가가 책을 똑바로 세웠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방에 혼자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 불쾌하게 다가왔다. 이 아파트에는 지우 외에 어떤 생명체도 살지 않았다. 식물 한 포기, 애완 로봇 한 대도 없었다. 완벽하게 고립된 공간이었다.
불현듯, 지우의 뇌리에 스친 생각이 있었다.
이 아파트, 37층에 지우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
불과 한 달 전, 바로 위층에 살던 노인이 돌아가셨다. 늘 혼자였던 노인은 아파트 관리 시스템을 통해 비상 호출을 했지만, 그마저도 너무 늦었다. 노인의 죽음은 옆집은 물론 아래층인 지우에게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경비 로봇이 부패 냄새를 감지해 뒤늦게 발견되었다. 도시의 고독사, 이제는 흔하디흔한 일이 되어버린.
지우는 그 노인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늘 창백하고,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가끔은 중얼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통해 들려오기도 했다.
‘뭐야.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지우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낡은 미신 같은 건 믿지 않았다. 모든 현상에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야 했다.
갑자기, 싱크대 쪽에서 ‘덜그럭’ 하는 소리가 났다.
지우는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싱크대 위, 컵 건조대에 걸려 있던 머그컵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세라믹 컵이 산산조각 났다.
지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번에는 명백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런 진동도 없었다. 그냥, 갑자기 떨어져 깨졌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등줄기에 차가운 식은땀이 흘렀다.
“누구… 없어?”
목소리가 쥐어짜듯 나왔다.
정적. 산산조각 난 컵 조각들만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아파트 내부 센서 작동 여부를 확인했다. 이상 무. 침입자 없음. 습도 정상. 온도 23도.
하지만 지우의 체감 온도는 영하를 맴도는 듯했다.
그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식탁 위에서, 지우가 즐겨 마시는 고급 브랜디가 담긴 작은 유리병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병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지우는 숨을 멈췄다. 눈을 크게 떴다.
병은 허공에 떠올랐다.
정확히 10센티미터.
그리고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콰앙!’
아니, 바닥이 아니었다.
병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유리병은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박살이 났다.
브랜디와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순식간에 방 안을 채웠다.
지우는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마비된 듯했다. 뇌는 텅 비었고, 심장만이 미친 듯이 발악하고 있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었다.
환각일 리 없었다. 모든 감각이 선명했다.
차가운 공기. 깨진 유리 파편. 코끝을 찌르는 술 냄새.
그리고,
방금 전까지 브랜디 병이 떠 있던 허공에서,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너무나도 작고, 너무나도 흐릿해서,
그것이 단순한 환청인지, 아니면 실제 존재하는 소리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우는 분명히 들었다.
*…나가…*
귓가에 맴도는 속삭임과 함께, 지우의 눈앞에 있던 홀로그램 스크린이.
갑자기,
‘지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글리치와 노이즈로 뒤덮이며.
빨갛게.
핏빛으로.
번져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