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 독립적인 단편 소설

밤 열한 시, 유하의 작은 자취방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서는 말랑한 로맨스 드라마가 재생되고 있었지만, 유하의 눈은 공허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목에 감긴 얇은 은색 팔찌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임무가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필 이런 날 또….”

유하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고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와중에, 불시에 찾아오는 이 ‘업무’는 그녀의 일상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팔찌는 한동안 잠잠했었다.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질 거라 믿었던 건 순진한 착각이었을까.

팔찌의 진동이 점차 강해지더니, 희미한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유하는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닫고 일어섰다.

“어디서 또 무슨 짓을 벌이는 거야.”

팔찌가 가리키는 곳은 북쪽으로 세 블록 떨어진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지은 지 십 년이 채 안 된,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물이었다. 유하는 평범한 트레이닝복 위에 후드티를 걸치고 가방을 챙겨 나섰다. 어둠 속으로 녹아드는 그림자처럼, 그녀는 소리 없이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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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은 새벽 세시에도 눈을 감지 못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천장에서 들려오는 긁는 소리가 마치 제 심장을 갉아먹는 듯했다.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 현상이었다. 처음엔 수도관 소리려니 했다. 그러다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리고, 선반 위의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지은은 두려움에 질려 경찰에 신고했지만, ‘기물 파손 신고는 접수할 수 없다’는 싸늘한 대답만 돌아왔다. 건물 관리사무소도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만….”

어젯밤에는 더 심했다. 거실의 소파가 혼자 힘겹게 움직이며 벽에 부딪혔다. 지은은 비명을 지르며 침실로 도망쳤다. 이제 그녀는 거실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침실 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제발… 제발 사라져 줘….”

그녀의 귓가에 낯선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침실 문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지은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제 정말 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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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는 아파트의 가장 높은 층인 13층에 도착했다.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싸늘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1304호. 팔찌가 강렬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떨고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길한 기운이 복도 전체를 짓누르는 듯했다.

유하는 망설임 없이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손목에 감긴 팔찌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시작해 볼까.”

순간, 얇은 은색 팔찌가 섬광을 내뿜었다. 익숙한 빛의 파동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푸른색과 은색이 어우러진 전투복으로 변모시켰다. 긴 머리칼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반짝였고, 눈빛은 별처럼 빛났다. 한 손에 든 홀은 끝에 작은 수정이 박혀 있었다.

“어둠을 밝히는 별의 안내자, 유하!”

외치자마자, 잠겨 있던 문이 낡은 경첩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가구는 뒤집히고, 액자는 산산조각 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검고 끈적한 그림자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둠의 기운이 형태를 갖추려 애쓰는 듯했다.

“끼이이이익!”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유하의 귀를 찢었다. 그림자들이 일제히 유하를 향해 돌진했다. 유하는 가볍게 몸을 피하며 홀을 휘둘렀다. 홀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파장이 그림자들을 꿰뚫고 지나가자, 그림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그라졌다. 하지만 곧 새로운 그림자들이 솟아났다.

“꼴에 끈질기네.”

유하는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이 정도로 강력한 폴터가이스트는 흔치 않았다. 단순한 악령이 아니었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절망과 분노를 먹고 자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 같았다. 유하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거실 한쪽 벽에 걸려 있던 낡은 사진액자. 액자 속에는 행복해 보이는 세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유하의 눈에는 그 액자 주변으로 검고 붉은 기운이 휘감겨 있는 것이 보였다.

“네가 근원이었군.”

유하가 홀을 들어 올리자, 홀 끝의 수정이 밝게 빛났다. “별빛 실타래, 엮어라!”

수정에서 무수히 많은 은빛 실타래가 뿜어져 나와 거미줄처럼 공간을 가득 채웠다. 실타래는 꿈틀거리던 그림자들을 얽어매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은 몸부림쳤지만, 별빛 실타래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액자에서 검붉은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마치 거대한 촉수처럼 유하를 향해 뻗어 나왔다.

“크으으윽!”

그것은 이전 세입자의 깊은 절망과 자살로 인한 증오가 겹쳐지면서, 이 공간에 고여 증폭된 악의였다. 유하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듯 날카로운 기운이 그녀를 덮쳤다. 유하는 홀을 방패처럼 들어 올렸다. “별의 장막, 펼쳐져라!”

은빛 장막이 그녀를 감싸자, 검붉은 기운은 장막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 유하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저 액자를 정화해야 했다.

유하는 은빛 장막을 유지한 채, 검붉은 촉수 사이를 뚫고 액자를 향해 전진했다. 촉수들이 그녀의 몸을 휘감으려 했지만, 장막에 닿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침내 액자 앞에 도달한 유하는 홀 끝의 수정을 액자에 갖다 댔다.

“별의 축복이여, 이 고통을 정화하라!”

수정에서 강력한 은빛 섬광이 뿜어져 나와 액자를 감쌌다. 액자에서 솟아나던 검붉은 기운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수축하기 시작했다. 사진 속 행복한 가족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는 듯했다가,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검붉은 기운은 점차 옅어지더니, 마지막에는 하얀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아아….”

홀을 든 손에서 힘이 풀렸다. 유하는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숨을 골랐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뒤늦게 침실 문이 빼꼼 열리고, 창백한 얼굴의 지은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눈은 공포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 저기… 넌 누구세요…?”

유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별거 아니에요. 잠시 집에… 문제가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괜찮아요.”

그녀는 홀 끝의 수정을 지은의 이마에 살짝 갖다 댔다. “잊으세요. 오늘 있었던 모든 불쾌한 일들을.”

지은의 눈빛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유하는 쓰러지듯 잠든 지은을 조심스럽게 침실로 옮겨 침대에 눕혔다.

“푹 쉬어요. 이제 정말 괜찮을 테니까.”

유하는 거실로 돌아와 흐트러진 가구들을 대충 정리했다. 완전하게 복구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누군가 난입해서 난동을 부린 것처럼 보이게는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망가진 액자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액자 속 가족은 이제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

다시 평범한 옷으로 돌아온 유하는 어둠 속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또 하나의 임무를 마쳤다는 안도감과, 다음엔 또 어떤 불길한 현상이 그녀를 기다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뒤섞여 있었다.

유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별들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밤도, 누군가는 깨어 있어야 한다.”

그녀의 손목에 감긴 은색 팔찌가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내일은 다시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잡한 과제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좋아하는 드라마를 시청하며 피로를 풀 것이다. 하지만 유하는 알고 있었다.

이 도시의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다른 균열이 생겨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녀는 또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고요한 밤공기 속에, 유하의 작은 그림자가 도시의 불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