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도시의 잔해가 잿빛 하늘 아래 잠들어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거리는 이제 부서진 건물들과 뼈대만 남은 자동차들의 무덤이 되어, 피와 살을 갈구하는 불청객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지혁은 녹슨 철근이 삐져나온 잔해 위를 조심스럽게 뛰어넘었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도끼는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고, 등에는 소총이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의 눈빛은 메마른 땅처럼 황량했지만, 그 안에 타오르는 불씨 하나만큼은 선명했다. 복수심. 오직 그것만이 그를 이 끔찍한 세상에서 살아 숨 쉬게 하는 이유였다.
3년.
지하 주차장 그 끔찍한 악몽 속에서 그가 홀로 버텨낸 시간이었다. 부서진 다리를 질질 끌며 간신히 좀비 떼를 피해 도망치던 그때, 태준은 그를 보았다. 분명 보았다. 도움을 청하는 그의 눈빛을, 살려달라 애원하던 그의 비명을. 하지만 태준은 망설임 없이 철문 밖으로 빠져나가 빗장을 걸어 잠갔다. “미안하다, 지혁아. 어쩔 수 없었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태준의 얼굴에는 공포와 함께 미미한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문 건너편에서 들려오던, 지혁의 심장을 찢어놓던 태준의 마지막 말. “네가 희생해줘야 모두가 살아….”
지혁은 살아남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혹은 저주처럼 살아 돌아왔다. 태준의 말대로라면 그는 ‘희생’해야 마땅했지만, 그는 그 말을 증오 삼아 버텼다. 그리고 이제, 그는 태준이 도피해 숨어있다는 거대한 생존자 캠프, ‘희망의 보루’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철조망과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캠프는 멀리서도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어쩌면 예전의 삶과 비슷한 안락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역겨운 상상에 지혁은 이를 갈았다. ‘네 덕분에’ 내가 겪어야 했던 지옥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캠프 외곽의 폐허가 된 건물 옥상에 몸을 숨긴 지혁은 밤새도록 캠프의 경비 체계를 분석했다. 물샐틈없이 견고해 보였지만, 썩은 내가 나는 세상에서 완벽한 것은 없었다. 그는 과거 군 복무 시절 익혔던 기술과 3년간 생사의 기로에서 갈고닦은 생존 본능을 총동원해 취약점을 찾아냈다. 폐수관을 통해 지하로 침투하는 것.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은밀한 방법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지혁은 망설임 없이 폐수관으로 기어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와 차가운 물이 그를 감쌌지만, 그의 마음은 오직 복수라는 불길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한참을 기어간 끝에, 그는 캠프 내부의 지하 통로로 연결된 맨홀 뚜껑 아래에 도착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고 머리를 내밀자,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 낡은 창고의 모습이 드러났다. 성공이었다.
지혁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훈련받은 경비원들의 눈을 피해 그는 캠프의 지도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태준의 위치를 파악했다. 태준은 캠프의 ‘운영 위원회’ 소속이었다. 그들은 가장 안전하고 쾌적한 건물에서 생활하며, 다른 생존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었다. 역겨웠다. 지혁은 태준의 방이 있는 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태준을 발견했다. 예전보다 살이 붙고, 깨끗한 옷을 입은 태준은 경비원 몇 명과 함께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배신자의 얼굴에는 평화로움과 여유까지 감돌았다. 그 순간 지혁의 머릿속에 핏빛 안개가 서렸다.
“태준아.”
지혁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마치 겨울 호수에 얼어붙은 칼날 같았다. 태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지혁을 알아보는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경비원들은 총을 겨누려는 듯 몸을 움직였지만, 지혁의 손에 들린 도끼가 이미 태준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움직이면, 이놈의 숨통부터 끊어버린다.” 지혁이 위협적으로 말했다.
경비원들은 얼어붙었다. 태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그의 눈은 공포로 흔들렸다.
“지… 지혁아? 네가 어떻게…? 살아있었어…?” 태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혁은 비웃었다. “네 덕분에. 네가 날 죽음의 문턱에 밀어 넣었을 때, 난 살아남았다. 오직 너에게 갚아주기 위해서.”
“오해야, 지혁아!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었어! 네 다리가 부러졌었잖아! 우리 둘 다 죽을 수는 없었어! 나는 모두를 살리려고…” 태준이 변명하듯 외쳤다.
“모두? 아니, 너 자신을 살리려고 했겠지. 너는 내가 그곳에서 좀비들에게 찢겨 죽는 걸 바라봤을 거다.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었으니까.” 지혁의 도끼 날이 태준의 목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붉은 선이 그의 피부에 새겨졌다.
“아니야! 믿어줘, 지혁아! 나는 정말… 흐읍!”
“내가 그 지하 주차장에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릴 때, 너는 여기서 따뜻한 잠자리에서 잠들었겠지. 내가 굶주림과 갈증에 허덕일 때, 너는 배불리 먹었겠지. 내가 동료의 시체를 밟고 도망쳐야 할 때, 너는 안전을 빌미로 다른 사람들을 통제했겠지.”
지혁의 눈은 증오로 이글거렸다. 그는 태준의 목을 잡고 거칠게 끌고 갔다. 경비원들은 총을 겨누고 있었지만,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지혁은 태준을 그대로 질질 끌어, 캠프의 심장부를 관통해 외곽으로 향하는 통로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지혁아! 놔줘! 살려줘! 제발!” 태준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3년간의 고통으로 단련된 지혁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지혁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마침내 그들은 캠프 외곽의 높은 망루에 도착했다. 망루는 철조망 너머의 암흑을 비추는 탐조등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바로 아래는 감시가 소홀한 좁은 틈새가 있었다. 그 틈새 너머에는, 끝없이 몰려드는 좀비 떼가 바다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기억나나, 태준아? 네가 날 버리고 간 그 지하 주차장. 그때 네가 나에게 해줬던 그 말을, 이제 내가 너에게 해줄 차례다.”
지혁은 태준을 망루의 난간에 매달았다. 태준의 발아래에는 수천, 수만의 좀비 떼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썩어가는 살점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흐아아악! 지혁아! 제발!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뭐든지 할게! 내가 가진 모든 걸 줄게!” 태준은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공포에 질린 그의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네가 가진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내 고통의 대가였다. 네 비겁함의 결과였고. 이제 네가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안 돼! 지혁아! 우리는 친구였잖아!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마! 부탁이야! 네가 아니면 나는… 나는 죽어!”
“나는 죽지 않았다. 너 때문에.” 지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너도 죽지 않을 거다. 적어도 당장은.”
지혁은 태준의 손에 매달린 밧줄을 조금 풀었다. 태준의 몸이 더 아래로 떨어지며 좀비 떼의 손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가 되었다. 좀비들은 미친 듯이 팔을 뻗으며 태준의 살점을 탐했다. 그들의 손끝이 태준의 발목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흐아아아아악! 안 돼! 놔줘! 놔달란 말이야! 살려줘! 지혁아! 지혁아!” 태준의 비명은 절규로 변했다.
지혁은 태준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3년 동안 그의 마음을 지배했던 끓어오르는 복수심이, 이제 차가운 만족감으로 변해갔다. 이보다 더 좋은 복수는 없을 터였다. 죽음보다 더한 공포, 그리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절망 속에서 태준은 스스로의 죄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될 것이다.
지혁은 망루 아래 좀비들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이제 경비병들이 눈치채고 몰려올 시간이었다. 그는 태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응시했다.
“이게 네가 날 버린 대가다, 태준아. 네가 죽기 전까지, 매 순간 그날의 악몽을 맛보게 될 거다.”
지혁은 망설임 없이 손에 쥔 밧줄을 놓았다.
태준의 비명과 함께 그의 몸은 좀비 떼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수많은 손길이 그를 향해 뻗어왔고, 살을 찢는 소리가 암흑을 갈랐다. 지혁은 그 소리를 뒤로한 채 망루에서 몸을 던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랜 시간 그의 영혼을 짓눌렀던 거대한 바위가 이제야 비로소 부서진 듯했다. 하지만 이 끔찍한 세상에서, 그가 걸어야 할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복수는 끝났지만, 생존은 계속될 테니까. 그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다시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로, 태준의 마지막 비명과 함께 좀비들의 끔찍한 포식 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