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골목의 밤은 언제나 같았다. 낮 동안은 아스칸 제국의 강철 부츠 아래 짓눌려 신음하던 골목이, 해가 지면 그 그림자를 더욱 길게 드리우며 생존의 아귀다툼을 시작하는 시간. 낡은 판잣집의 틈새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등불만이 이 어둠 속에서 삶의 끈을 놓지 않은 이들의 존재를 알렸다.
강하준은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깡마른 몸뚱이는 제국군이 낮에 쑤셔 넣은 주먹밥 한 덩이로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잿빛 구름이 달을 가린 하늘 아래, 폐허가 된 상점가에서는 굶주린 개들이 먹잇감을 찾아 낮게 으르렁거렸다. 멀리, 제국의 수도 웅장한 아르테미스 성의 첨탑들이 밤하늘을 꿰뚫고 서 있었다. 그 첨탑들 끝에서 반짝이는 마법의 불빛은, 이곳 잿빛골목의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 뿐이었다.
“젠장, 빌어먹을 제국.”
하준의 입에서 거친 숨과 함께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시선은 상처투성이의 맨발에 꽂혀 있었다. 발톱은 빠져나가 너덜거리고, 찢어진 상처는 곪아가고 있었다. 어제, 물이 고인 웅덩이에 발을 담갔다가 제국 병사에게 발길질당한 탓이었다. 감히 황제 폐하의 행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이유로.
그때였다. 낡은 나무 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이 골목에서 유일하게 제국군의 간섭을 덜 받는 곳, 엘라 노파의 약재상이었다. 노파는 낮에는 버려진 약초를 주워다 팔고, 밤에는… 글쎄, 노파가 밤에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다만, 잿빛골목의 굶주린 이들에게 가끔 따뜻한 죽 한 그릇을 건네는 자비로운 얼굴 뒤에, 뭔가 숨겨진 불꽃이 있다는 것만은 모두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준아, 안에 들어오거라.”
나직하지만 단호한 노파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하준은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를 붙잡았지만, 노파의 부름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 골목에서 노파에게 빚진 것이 많았다.
약재상 안은 바깥의 어둠과는 달리 은은한 향이 가득했다. 말린 약초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흙으로 빚은 도자기와 유리병들이 선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노파가 앉아 있었다. 촛불 하나가 노파의 주름진 얼굴에 길고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앉거라.”
하준은 노파 맞은편, 닳아빠진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의 눈은 촛불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노파의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은 언제나처럼 침착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깊은 심연을 담고 있는 듯했다.
“알고 있느냐? 밤안개 던전에서 제국군이 대규모 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노파의 말에 하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밤안개 던전은 잿빛골목에서 동쪽으로 사흘 길을 가면 나오는, 오래되고 위험한 미궁이었다. 과거에는 모험가들이 드나들었지만, 몇 년 전 제국이 던전 입구를 봉쇄하고 무언가 캐내기 시작하면서 일반인에게는 금지된 구역이 되었다. 제국은 거기서 나오는 ‘어둠의 결정’이라는 것을 수도 아르테미스 성으로 실어 날랐고, 그 결정들이 제국의 마법 장치들과 마도 병기들을 가동하는 핵심 동력원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네, 들었습니다. 어둠의 결정 채취량을 늘리려는 모양입니다. 덕분에 잿빛골목의 노예들이 더 많이 끌려갔죠.”
하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의 친구 중 몇몇도 밤안개 던전의 강제 노역에 끌려갔다가 소식 없이 사라졌다.
“그것만이 아니다. 제국은 던전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고대 유물을 발견했다. ‘영혼 정화 장치’라고 불리는 것인데, 그것이 완전히 가동되면… 이 땅의 모든 생명력과 마나를 빨아들여 제국의 권력을 무한정 증폭시킬 것이다. 이미 잿빛골목 주변의 토지는 황폐해지고 있지 않더냐.”
노파의 말에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만 해도 드문드문 보이던 풀과 나무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땅은 메말랐고, 우물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 막아야 한다. 그 장치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던전의 가장 깊은 곳, ‘망각의 심연’에 봉인되어 있는 ‘균열의 봉인석’을 찾아내는 것이다.”
하준은 노파의 말을 듣고 침을 꿀꺽 삼켰다. 망각의 심연이라니. 그곳은 모험가들 사이에서도 살아 돌아온 자가 없다는 전설적인 공간이었다. 더군다나 제국군이 밤안개 던전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봉인석을 찾아내는 것이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노파께서는… 저에게 그걸 찾아오라는 말씀이십니까?”
하준의 목소리에 일말의 불안감이 섞여 나왔다. 그는 뛰어난 전사도, 강력한 마법사도 아니었다. 그저 잿빛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평범한 청년일 뿐이었다.
“네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 너는 이 골목의 어느 누구보다 빠르고, 눈치 빠르며, 생존 본능이 강하다. 게다가, 너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심장을 가졌다.”
노파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하준을 꿰뚫었다. 하준은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봤다. 제국 병사의 횡포에 맞서다 얻어맞았던 상처들, 굶주린 아이에게 제 주먹밥을 나눠줬던 기억, 억울하게 끌려가는 이웃을 위해 소리쳤던 무모함. 노파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밤안개 던전은 제국군이 깔려 있고, 괴물들도 득실거립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혼자가 아니다.”
노파가 고개를 살짝 돌리자, 약재상 안쪽 구석의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가느다란 몸매에 재빠른 움직임, 그리고 등에 짊어진 활과 허리에 찬 단검이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지안?”
하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안은 하준과 함께 잿빛골목에서 자란 동갑내기였다. 뛰어난 궁술 실력과 날렵함으로 가끔 숲에서 사냥감을 구해오곤 했지만, 모험이나 위험한 일에는 질색하는 성격이었다.
“오랜만이다, 하준아. 노파의 말씀이 워낙 비장하셔서 거절할 수가 없더군.”
지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얼굴에는 하준과 비슷한 피로와 고통이 스며 있었지만, 눈빛만은 단호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에게 시간은 없다. 새벽녘이 오기 전까지 밤안개 던전에 진입해야 한다. 제국의 순찰이 강화되기 전에.”
노파는 작은 천 조각을 내밀었다. 펼쳐보니 밤안개 던전의 대략적인 지형과 ‘망각의 심연’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중간중간에는 제국군의 배치 예상 지점과 괴물의 서식지 같은 위험 구역도 그려져 있었다. 조악했지만,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이 지도는 내가 수십 년간 모은 정보와… 너희들처럼 던전에 잠입했던 이들의 희생으로 얻어낸 것이다. 봉인석을 찾으면, 이 안에 새겨진 주술 문구를 따라 장치에 접촉시켜라. 그러면 장치는 잠시 기능을 멈출 것이다.”
노파는 하준의 손에 낡은 단검 하나를 쥐여주었다. 날은 무뎠지만, 단단한 쇠로 만들어진 듯했다. 지안은 이미 자신의 활을 고쳐 메고 화살통을 확인하고 있었다.
“꼭 성공해야 한다, 하준아. 이것은 너희들만의 싸움이 아니다. 이 땅에 짓밟힌 모든 이들의 염원이 담긴 싸움이다.”
노파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하준의 어깨를 짓눌렀다. 제국에 대한 분노, 친구들의 희생, 그리고 이 골목에 남아있는 이들의 희망. 그 모든 것이 그의 마음속에서 들끓었다.
“알겠습니다, 노파.”
하준은 단검을 꽉 쥐었다. 그의 눈빛은 잿빛골목의 밤처럼 어둡고 깊었지만, 그 심연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결의가 타올랐다.
—
밤안개 던전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제국군의 감시를 피해 야간에만 이동해야 했고, 숲 속의 맹수들과 굶주린 도적떼를 피해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다. 이틀 밤낮을 걸어, 마침내 그들은 밤안개 던전의 입구에 도착했다.
거대한 바위산 아래 뻥 뚫린 동굴 입구는 마치 거인의 입처럼 검게 벌어져 있었다. 입구 주변에는 제국군이 설치한 임시 막사가 보였고,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불을 쬐고 있었다. 다행히도, 노파가 알려준 대로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제국군이 눈치채지 못한 작은 샛길이 있었다.
“저기다, 하준아.” 지안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둘은 몸을 숙여 빽빽한 덤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흙냄새와 축축한 이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한참 기어가자, 마침내 넓은 공간이 나왔다.
“여기가… 밤안개 던전의 내부인가.”
하준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곳은 동굴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지하 도시의 폐허 같았다. 천장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기둥처럼 솟아오른 거대한 암석들이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었다. 발밑에는 오래된 석재 조각들과 이름 모를 괴물의 뼈들이 뒹굴었다. 공기는 차갑고 습했으며, 귀에 거슬리는 낮고 불쾌한 소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던전의 이름처럼 희미한 안개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 안개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 하준의 심장을 조여왔다.
“조심해, 하준아. 제국군 순찰대도 있겠지만, 이 안의 토착 괴물들도 만만치 않을 거야.”
지안이 활시위를 시험하듯 당겨보며 속삭였다. 그의 눈은 사방을 경계하며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하준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손에 쥐여진 낡은 쇠붙이가 의외로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는 지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이 던전의 어둠 속에서, 그는 희망을 찾아야 했다. 잿빛골목과 그곳의 모든 이들을 위해.
그들이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안개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곧이어, 끈적이는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