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은 축 늘어진 몸을 낡은 소파에 파묻었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원룸은 여전히 그만의 우주였다. 현관문 옆에 비스듬히 세워둔 낡은 장검은 어쩐지 오늘따라 더 무겁게 느껴졌다. 이 도시의 수많은 ‘던전’ 중 하나를 막 정리하고 온 참이었다. 비릿한 몬스터의 피 냄새는 샤워를 해도 잔향처럼 코끝에 남아 지끈거렸다.
“젠장, 피곤하네.”
낮게 중얼거리며 리모컨을 찾았지만, 손끝에 잡힌 건 며칠 전부터 충전만 하고 있던 ‘마나 배터리’였다.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바닥에 내던지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굴러갔다. 이 정도는 양호했다. 어떤 날은 눈앞에서 폭발하거나, 저절로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기도 했으니까. 이 낡은 건물은 왠지 모르게 이상한 ‘잔류 마나’가 많이 흐르는 곳이었다. 그래서 월세가 쌌고, 지훈은 기꺼이 이곳에 눌러앉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냉장고 문을 열어 캔커피를 꺼냈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탄산 기포가 올라왔다. 한 모금 마시자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카페인이 신경을 건드렸다. 캔커피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려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캔커피가 탁자에 닿기도 전에, 탁자 위 먼지투성이였던 오래된 잡지 한 권이 스르륵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야?”
지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작 잡지 한 권 떨어진 것 가지고 유난 떨 일은 아니었다. 이런 낡은 건물에서는 가끔 지반이 흔들리거나, 윗집이 쿵쿵거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선반 위 물건들이 조금씩 움직이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잡지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밀린 것처럼, *스르륵* 소리마저 내며 미끄러졌다. 그리고 잡지가 떨어진 자리, 캔커피를 놓으려던 탁자 표면에 희미한 물방울 자국이 하나 생겼다. 캔커피 바닥에 묻어있던 물방울이 떨어진 것이었다.
‘내가 실수로 건드렸나…?’
고개를 갸웃하며 캔커피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전 잡지가 떨어질 때, 캔커피는 아직 공중에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TV를 켰다. 뉴스에서는 오늘도 어디어디 ‘던전’이 돌발적으로 생성되었다는 둥, 탐사대원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다는 둥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자신과 별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그때였다. 부엌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벌떡 일어섰다. 평소와 다른 소리였다. 던전에서 흔히 듣는 괴물의 포효나 붕괴음과는 확연히 달랐다. 주방으로 향하자, 싱크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컵 하나가 깨져 있었다. 산산조각 나 바닥에 흩어져 있는 유리 파편들.
“이건 또 무슨….”
지훈은 이를 악물었다. 단순히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컵이 놓여 있던 위치는 싱크대 한가운데였고, 바닥에 떨어진 파편들은 컵이 ‘던져졌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벽에 부딪힌 흔적까지 선명했다.
“누구 있어?”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도 없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침입자는 없었다. 그의 예민한 ‘마나 감지’ 능력은 어떤 생명체의 흔적도 포착하지 못했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평범한 ‘잔류 마나’ 현상이 아니었다. 잔류 마나는 기껏해야 전등을 깜빡이게 하거나, 물건을 아주 조금 진동시키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유리 파편들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훈은 거실로 돌아와 현관 옆에 세워둔 장검을 집어 들었다. 평소 던전에 들어갈 때처럼,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금속 특유의 차가운 감촉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했다.
“나와. 거기 누구든지.”
그가 말했다. 적막만이 답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낡은 벽지 너머로 희미한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중얼거리는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착각일까?
그때, 거실 중앙에 놓인 작은 탁자가 갑자기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젠장!”
지훈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탁자는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 벽에 쾅 하고 부딪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탁자는 박살 났고, 나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들이 마치 발사된 총알처럼 튀어나와 벽에 박혔다. 액자에 걸려 있던 가족사진이 회전하며 땅에 떨어져 유리가 깨졌다. 방안의 모든 물건들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폭풍이 집어삼킨 것처럼.
이것은 ‘던전’이 아니었다. 던전은 보통 어딘가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을 통해 이세계의 마나와 생명체가 쏟아져 나오는 현상이었다. 이곳은 평범한 아파트, 그가 살고 있는 원룸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벌어지는 일은 그 어떤 던전의 초입보다도 기괴하고 강력했다.
“도대체… 뭐야, 너?”
지훈은 검을 높이 들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마나 감지 능력은 여전히 아무것도 포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명백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그를 노리고 있었다.
냉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여름밤인데도 불구하고 입김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벽에서 들려오던 속삭임이 더욱 또렷해졌다.
*…나가… 나가…*
낮게 깔리는 목소리.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목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 노인의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 남자의 목소리. 그것들이 한데 뭉쳐 그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벽 쪽을 노려봤다. 정확히는 싱크대 컵이 깨졌던 주방 쪽 벽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나가 아니었다. 훨씬 더 오래되고, 훨씬 더 뒤틀린, 불쾌한 기운이었다.
그때, 주방 벽면에서 거미줄처럼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틱, 틱, 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이윽고 벽 한가운데에 손바닥만 한 검은 구멍이 뚫렸다. 구멍 너머는 어둠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강렬한 ‘무언가’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흡사 작은 던전의 입구 같았다. 하지만 이토록 불길한 형태의 입구는 본 적이 없었다.
검은 구멍에서 섬뜩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구멍 주변의 벽지가 서서히 뜯겨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벽지 아래에서, 예상치 못한 것이 드러났다.
오래된 핏자국. 그리고 그 핏자국 위를 뒤덮은 알 수 없는 문양들. 고대 주술 문자 같기도 했고, 단순히 어린아이의 낙서 같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문양들에서 방금 전의 기괴한 폴터가이스트 현상과 똑같은 불쾌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젠장… 설마, 이 아파트 자체가 던전이었던 건가?”
지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까지 그가 상대했던 던전들은 도시 외곽의 폐건물이나,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곳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원룸, 벽 안쪽에 이런 끔찍한 것이 숨겨져 있었다니.
검은 구멍에서 튀어나온 냉기가 지훈의 몸을 휘감았다. 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구멍 너머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개의 붉은 점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의 눈처럼.
*…들어와… 들어와…*
속삭임이 이제는 그의 귓가에 직접적으로 울렸다. 마치 그 구멍이 자신을 부르는 듯했다. 지훈은 검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이 아파트, 아니 이 도시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검은 구멍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둠 속 붉은 눈은 마치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래, 들어가지. 네가 뭔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지훈은 피식 웃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타올랐다. 이곳은 이제 그의 ‘던전’이 되었다. 그리고 던전 탐험가 김지훈은, 눈앞의 미스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검은 구멍을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