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제1장: 균열의 서막**

이하준은 지쳤다. 서울의 심장이 내뿜는 소음과 열기에 온몸이 절여진 기분이었다. 퇴근길 버스는 언제나 꽉 막혔고, 창밖으로 스치는 고층 빌딩들은 그저 높고 차가운 벽돌 더미로 보일 뿐이었다. 그의 삶은 딱 그랬다. 닳고 닳은 구두처럼 반복되고, 미미하게 스러져 가는 일상. 유일한 안식처는 도시 외곽에 자리한 낡은 아파트 1304호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묵은 공기가 그를 맞았다. 쿰쿰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벽지 냄새가 뒤섞인, 지극히 평범하고 개인적인 냄새.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거실로 들어섰다. 텔레비전은 검은 화면으로 침묵했고, 낡은 소파 위에는 어제 벗어놓은 티셔츠가 쭈그려 있었다. 별 다를 것 없는 밤이었다. 차가운 수돗물로 대충 세수를 하고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컵에 따르려는데,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열쇠 꾸러미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분명 현관문 옆 걸이에 걸어두었을 터인데. 하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피곤해서 착각했나 보군.”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요새 부쩍 깜빡하는 일이 많아졌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하준은 다시 한번 멈칫했다. 어젯밤 분명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었던 시계가 서랍장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시간도 한 시간 가량 뒤로 가 있었다. 그는 찌푸린 미간으로 시계를 노려보다가 픽 웃었다. “이 녀석도 이제 맛이 갈 때가 됐군.” 건전지를 새로 갈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다시 협탁에 놓았다.

며칠 밤낮으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됐다. 냉장고 문이 희미하게 열려 있거나, 분명 잠가두었던 화장실 문이 스르륵 열려 있는 식이었다. 처음엔 피곤함 탓이려니, 혹은 낡은 건물 특유의 고장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는 좀 더 직접적인 변화가 느껴졌다.

거실의 형광등이 이유 없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전구를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간혹 복도에서 누군가 걷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렸지만, 현관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집 안 곳곳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한기였다. 보일러를 최대로 돌려도 방 한구석은 마치 지하 동굴처럼 싸늘했다.

“젠장, 정말 이러다 귀신이라도 나오겠네.”

하준은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과학을 신봉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귀신이라니,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그는 인터넷에서 ‘오래된 아파트 한기’, ‘형광등 깜빡임’ 등을 검색하며 이 모든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찾으려 애썼다. 낡은 배선, 습기, 건물의 뒤틀림… 모든 것이 그럴듯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목요일 밤은 그의 모든 합리적인 사고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피곤했던 하준은 저녁 식사 후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 드라마의 대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내일 발표할 보고서 내용만이 맴돌았다. 그때였다.

“덜컹!”

주방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하준은 고개를 돌렸다. 식탁 위 과일 접시에 놓여있던 사과 한 알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양이라도 키웠으면 녀석 짓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뭐야…?”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사과가 데구루루, 작은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그때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유리 테이블 위에서, 그가 가장 아끼는 도자기 컵이 쿵, 하고 살짝 들렸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컵 안에 남아있던 물이 흩뿌려졌다.

하준은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분명,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컵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숨도 쉬지 못하고 파편들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주방 싱크대 위의 접시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달그락달그락’ 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접시 하나가 떨어져 깨졌다. 이어서 컵들이, 수저통이, 심지어 무거운 냄비까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떨어져 굉음을 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주방 전체를 뒤집어엎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하준은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주방에서 시작된 현상은 거실로 번졌다. 텔레비전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검은 연기를 뿜으며 꺼졌다. 낡은 벽걸이 시계가 뚝 떨어져 박살 났고, 소파 위에 놓여있던 쿠션들이 저절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집 안의 모든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다가 이내 완전히 암전되었다. 거실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창밖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스며들 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하준은 기이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 소리나 건물 틈새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수천 년 묵은 바위가 갈라지는 듯한, 혹은 거대한 짐승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으르렁거리는 듯한, 아득하고 묵직한 소리였다. 소리는 그의 귓속을 파고들어 뇌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리고 한기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종류의 한기가 그를 덮쳤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모든 것의 온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심연의 차가움이었다. 그 한기가 그의 피부를 뚫고 뼛속까지 스며들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하준은 보았다.
거실 한가운데, 방금 전까지 유리 테이블이 놓여있던 바로 그 공간에서, 공기가 일그러지는 것을.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공간이 비틀리더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푸른색과 보랏빛이 뒤섞인 섬광이 번뜩였다. 그 섬광은 마치 다른 차원의 심연이 잠시 열렸다 닫히는 순간처럼 기이하게 아름답고, 동시에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공포를 품고 있었다.

섬광이 사라지자, 어둠이 더 짙어졌다.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한기는 여전히 그를 옥죄고 있었다. 그리고 하준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유령의 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아파트, 그의 평범한 삶이 뿌리내렸던 이 공간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균열을 내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 감춰진,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 ‘균열’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아파트 1304호. 그곳은 더 이상 이하준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세상의 끝이 시작되는 입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