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화: 잿빛 속의 한숨
메마른 먼지가 후드득, 낡은 방독면 유리창을 때렸다. 강진우는 텅 빈 눈으로 잿빛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은 죽어버린 지 오래된 세계처럼 탁했고, 그 아래 거대한 뼈대만 남은 건물들은 썩어가는 시체처럼 우뚝 서 있었다. 한때 번성했을 도시, 거대한 금속과 유리로 지어진 문명의 잔해는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젠장, 또 아무것도 없어.”
진우의 낮은 한숨이 방독면 안에서 희미하게 울렸다. 그의 찢어진 작업복은 흙먼지와 알 수 없는 피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허리춤에는 녹슨 단검과 닳아빠진 권총이 매달려 있었고, 짊어진 배낭은 텅 빈 것처럼 가벼웠다. 지난 사흘간, 그는 단 한 조각의 쓸만한 식량도 찾지 못했다. 물은 바닥난 지 하루가 지났다. 목마름이 턱을 긁고 들어와 온몸을 갉아먹는 듯했다.
이곳은 멸망한 세계의 심장부, ‘녹슨 심장부’라 불리는 도시의 외곽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위험하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잔해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했다. 한때는 ‘에덴’이라 불리며 인류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곳. 하지만 지금은 그저 거대한 고철 더미, 그리고 괴물들의 사냥터일 뿐이었다.
진우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타고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정적을 찢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수없이 반복된 생존의 경험이 만들어낸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어떤 소리도, 어떤 움직임도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쳇.”
주변은 온통 부서진 잔해와 뒤틀린 철골로 가득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 날카로운 금속이 긁히는 듯한 소음이 진우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그는 발아래 널브러진 닳아버린 홀로그램 패드를 발로 툭 찼다. 패드에는 금이 간 액정 너머로 한때 화려했을 도시의 모습이 섬광처럼 스쳤다 사라졌다. 그 화려함과 지금의 잿빛 풍경은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진우는 기억했다. 자신이 이 세계로 떨어지기 전, 살았던 곳은 이렇게 황폐하지 않았다. 분명 푸른 하늘과 맑은 물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꿈같았다. 악몽 속에서 깨어날 수 없는.
그는 무너진 백화점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천막처럼 너덜거리는 외벽, 새카맣게 그을린 내부는 기괴한 형상의 검은 덩굴식물로 뒤덮여 있었다. 그 덩굴 사이사이에 알 수 없는 독성을 품은 포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여기라면… 뭔가가 있을 수도 있어.’
진우의 눈은 빛에 반사되는 작은 금속 조각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원이 되는 세상이었다. 심지어 죽은 자의 뼛조각조차도.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눈앞의 폐허를 훑었다. 1층의 상점가는 이미 모든 것이 약탈당하고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저 위층에는…
그때였다.
_콰아앙!_
갑작스러운 굉음이 진우의 등골을 차갑게 식혔다. 진동이 건물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는 순식간에 몸을 낮춰 잔해 뒤로 숨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 소리는… 폭발음이 아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부딪히거나,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진우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숨을 들이켰다.
건물 한쪽 벽면이 통째로 뜯겨 나간 자리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는 마치 유령처럼 흐릿했지만, 그 거대하고 불길한 형체는 분명히 존재했다. 이질적인 검은 빛을 뿜어내는 수많은 촉수들이 무너진 벽면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촉수들의 끝에는… 날카로운 갈고리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망할… 저게 왜 여기까지…’
저것은 ‘심연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멸망 이후 이 세계에 나타난,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 보통은 도시의 더 깊은 곳, 오염된 에너지원이 집중된 곳에서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저것을 만나면, 생존자는 극히 드물었다.
진우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몸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라고 외쳤지만, 그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림자는 뜯겨 나간 벽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오려 애쓰는 듯했다. 갈고리 달린 촉수들이 주변의 잔해들을 짓뭉개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때, 촉수 중 하나가 진우가 숨어있는 잔해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거대한 그림자가 조금 더 몸을 밀어 넣으려는 순간, 진우의 눈에 작은 균열이 보였다. 그림자의 몸체, 촉수들이 시작되는 지점, 검은 에너지가 가장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곳에 희미한 균열이 있었다.
‘약점인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였다. 그는 닳아빠진 권총을 움켜쥐었다. 탄창에는 고작 세 발의 총알만이 남아있었다. 이 총알은 그의 생명줄이었다. 함부로 쏠 수 없었다.
그림자는 꿈틀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촉수 하나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진우가 숨어있는 곳을 향해 느리게 뻗어왔다. 갈고리가 달린 촉수 끝이 그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진우는 숨을 멈췄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었다.
‘지금이야.’
진우는 권총을 빠르게 겨눴다. 조준할 틈도 없었다. 그는 오직 본능에 의지했다. 방아쇠를 당겼다.
_파앙!_
귀청을 찢는 총성이 폐허에 울려 퍼졌다. 총알은 정확히 그림자의 몸체에 난 균열을 향해 날아갔다. 검은 에너지가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그림자는 순간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고통스러운 듯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_끼이이이이익-!_
그 소리는 쇠가 긁히는 듯했고, 동시에 수십 개의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불쾌한 음성이었다. 그림자는 뒤로 물러서며 뜯겨 나간 벽 밖으로 사라지려 했다. 진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두 번째 총알을 장전하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_파앙!_
이번에도 총알은 균열을 정확히 관통했다. 그림자는 크게 몸을 비틀었다. 뿜어져 나오던 검은 에너지가 일렁이며 약해지는 것이 보였다. 촉수들이 무기력하게 늘어졌다.
하지만 완전히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는 찢겨나간 벽 밖으로 완전히 몸을 빼려 안간힘을 썼다. 진우는 마지막 남은 총알을 장전했다.
‘끝장을 봐야 해.’
그림자가 벽 밖으로 거의 다 빠져나갔을 때, 진우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마지막 총알을 발사했다.
_파앙!_
총알은 그림자의 약점, 균열을 다시 한번 정확하게 명중했다.
_쿠우우우우우우웅!_
이번에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에너지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림자의 거대한 몸체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희미하게 잔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의 모든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식은땀이 그의 방독면 안을 적셨다. 그는 무사했다. 기적처럼.
총알 세 발로 심연의 그림자를 처치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지만, 눈앞의 잔해와 사라진 그림자의 흔적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잔해 사이를 헤치고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다가갔다.
건물 밖, 그림자가 쓰러진 자리에는 거대한 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그 안에는 검은 액체가 질척거렸고, 썩은 살 냄새와 함께 오묘한 금속 비린내가 진동했다.
진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그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대가는 컸다. 총알 세 발. 이제 그의 권총은 텅 비었다. 이 세계에서 총알은 목숨과도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텅 빈 배낭을 다시 고쳐 메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발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렸다. 진우는 고개를 숙였다. 검은 웅덩이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물체가 있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웠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투명한 수정이었다. 수정 안에는 맑은 물방울이 갇혀있는 듯 반짝였다. 그리고 수정 한쪽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건… 정화 수정?’
잊혀진 전설 속에서나 존재한다는, 오염된 물을 정화하고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는 그 ‘정화 수정’이었다. 멸망 전 문명 시대에나 사용되었던, 희귀하기 짝이 없는 유물.
진우는 눈을 크게 떴다. 목마름과 허기가 잠시 잊히는 순간이었다. 기적적인 발견이었다. 이것 하나만 있다면, 당장 며칠은 버틸 수 있는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수정을 꽉 쥐었다. 절망적인 폐허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의 귀에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_사악- 사악-_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발소리. 그리고 이 세계에 만연한, 섬뜩한 광기의 웃음소리.
진우는 다시 몸을 굳혔다. 이번에는 어떤 적일까. 심연의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를 노리고 나타난 것일까. 그는 텅 빈 권총을 다시 움켜쥐었다.
“젠장… 끝이 없군.”
정화 수정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이 잿빛 세계에서, 그는 계속해서 한 발짝씩 나아가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왜 자신이 이 세계에 떨어졌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어둠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생존을 위한 투쟁을 준비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그들은 진우를 발견할 터였다.
그는 숨을 고르며 고통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어디 한번 덤벼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