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유산
축축하고 무거운 침묵이 세계를 짓누르고 있었다. 폐허가 된 건물들의 앙상한 골격은 회색빛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잡초들이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한때 번성했을 거리는 이제 바람에 실려 오는 먼지와 부서진 유리 조각들, 그리고 이름 모를 잔해들로 가득했다. 지호는 발밑의 자갈들이 내는 소리조차도 날카롭게 느껴지는 적막 속에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고, 한 손에 든 녹슨 파이프는 차가운 위안을 주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잊힌 듯한 상점가에 들어섰을 때, 희미하게 비치는 햇빛이 깨진 쇼윈도를 통과하며 먼지 입자들을 춤추게 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철근이 바람에 흔들리는 삐걱거림, 그리고… 그 모든 소음 위로 덧씌워진 것 같은, 기이하게 일그러진 정적. 지호는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그런 정적은 일반적인 침묵보다 훨씬 더 소름 끼치는 법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소리가 삭제된 듯한, 오직 죽음만이 숨 쉬는 공간.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목은 이미 오래전부터 바짝 말라 있었지만, 남아 있는 물은 단 한 모금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지호는 눈앞의 낡은 상점을 훑어보았다.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 있었고, 내부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간판은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지만, 어렴풋이 예전 식료품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희망은 거의 없었지만,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파이프를 고쳐 잡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퀴퀴하고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선반들은 무너져 있었고, 내용물은 바닥에 흩뿌려져 먼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쥐들이 갉아먹은 흔적이 역력한 포장지 조각들만이 뒹굴고 있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선반 아래쪽, 사람들이 미처 가져가지 않았을 법한 구석진 곳을 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굽히고 손전등을 켰다. 낡은 건전지 때문인지 불빛은 불안하게 깜빡였다. 진열대 뒤편, 부서진 나무판자 더미 사이에 찌그러진 금속 캔 하나가 보였다. 지호의 심장이 순간 요동쳤다.
“…이런.”
캔은 녹슬어 있었지만, 부풀어 오르거나 심하게 손상된 것 같지는 않았다. 내용물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먹을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캔을 꺼내 들었다. 무게는 꽤 나가는 걸 보니 비어 있진 않았다. 배낭에 넣으려던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몸의 모든 세포가 경고음을 울렸다. 지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깨진 진열대, 먼지, 그리고 어둠. 하지만 분명히,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이전의 무거운 정적과는 또 다른, 소리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이상한 공허함. 지호는 파이프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졌다.
그때였다. 창문 밖, 흐린 하늘 아래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희미한 잔상처럼, 눈이 제대로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몸의 윤곽은 흐릿했고, 움직임은 인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불연속적이고, 기괴하며,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듯했다.
지호는 숨을 죽였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이 폐허가 된 세상에 기생하며 살아있는 것들을 사냥하는 존재들. 그들은 소리 없이 나타나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때로는 인간의 형상을 띠고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움직임과 시선은 언제나 끔찍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가 파괴된 이유 중 하나였다.
상점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도, 지호는 식은땀을 흘렸다. 들키지 않았기를 바라며 숨을 죽이고 움직임을 멈췄다. 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십 분, 이십 분…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창밖의 그림자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지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감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의 모든 소리에 집중했다. 들리는 것은 오직 심장이 거칠게 뛰는 소리와, 귓가에 맴도는 정체 모를 바람 소리뿐.
확실히 안전하다고 느꼈을 때, 지호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배낭에 캔을 구겨 넣고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최대한 소리 내지 않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기로 했다.
녹슨 철문은 지독한 비명소리를 내며 열렸다. 뒤편 골목은 쓰레기와 폐기물로 가득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 걷던 지호는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멈춰 섰다.
‘휘파람 소리…?’
그것은 인간의 휘파람 소리 같았지만, 어딘가 박자가 어긋나고 음정이 뒤틀려 있었다. 어린아이가 흥얼거리는 것 같기도, 바람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올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림자들이 종종 인간의 목소리나, 친숙한 소리를 흉내 내어 사람들을 유인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지호의 몸이 굳었다. 저 소리는 분명… 저편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버려진 아파트 건물. 지호는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건물 벽에 바싹 붙였다. 파이프를 든 손에 땀이 흥건했다.
휘파람 소리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마치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며 지호를 찾는 듯, 소리가 이리저리 울렸다. 저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단 말인가? 혹시 저 소리가 유인책이 아니라, 무언가가 지호를 ‘보고’ 지켜보고 있다는 경고음이라면?
등골을 타고 싸늘한 공포가 기어 올라왔다. 지호는 고개를 들어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창문들이 마치 텅 빈 눈동자처럼 자신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 중 한 창문, 5층쯤 되는 높이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무언가가 유리창 너머에서 흔들렸다. 흐릿하고, 윤곽이 불분명한 그림자. 하지만 분명히 인간의 형상이었다. 그것은 천천히, 너무나도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더니, 텅 빈 유리창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응시’는 지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저것은 그림자가 흉내 낸 ‘무언가’였다. 아니, ‘누군가’였다. 지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휘파람 소리가 뚝 끊겼다.
이어진 것은 지독한 침묵이었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이전의 어떤 침묵보다도 훨씬 더 악의적이고 불길했다. 이제 그것은 소리로 유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호를 ‘보고’ 있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지호는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골목길을 미친 듯이 질주했다. 발밑의 잔해들이 채찍처럼 종아리를 때렸다.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온몸을 지배했다.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달렸을까, 간신히 어느 건물의 어두운 입구로 몸을 숨겼다. 철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더 이상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낡은 복도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등 뒤로 차가운 벽이 느껴졌다.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심장은 발작하듯 뛰었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지호는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을 응시했다. 여전히 어둠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그것들을 찾아.
이 세계는 그렇게 변했다. 생존은 오직 운과 순발력에 맡겨진 도박이었다. 언젠가 평범했던 일상이, 이제는 기억 속의 낡은 유산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지호는 배낭 속의 찌그러진 캔을 꽉 움켜쥐었다. 이것이 오늘 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일 아침을 기약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무거운 침묵이 세계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또 다른 기이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속삭이는 듯한, 혹은 울부짖는 듯한, 이 모든 파괴의 근원인 어둠의 목소리.
지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밤도,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