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폐허는 언제나 습하고 끈적한 죽음의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잔해들 사이를 헤치며 나아가는 강민의 눈은 이미 그 익숙한 풍경에 무감해진 지 오래였다. 그의 등에는 낡고 녹슨 소총이 메어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온갖 폐기물에서 뜯어낸 조각들로 조악하게 만든 칼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은아와 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먼지와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살아 움직였다.
“젠장, 오늘은 영 시원찮네.” 찬이 낡은 철문을 발로 차 열며 투덜거렸다. 안쪽은 이미 감염자들이 휩쓸고 간 흔적만 역력했다. 뜯겨 나간 살점, 흥건한 핏자국, 그리고 텅 빈 선반들. “여기도 끝이군. 제국 놈들은 도대체 뭘 찾아간 거지? 우리 같은 밑바닥들이 먹을 것도 없는데.”
강민은 대꾸 없이 폐허의 한쪽 벽에 기대섰다. 그의 시선은 아득히 멀리 보이는, 빛나는 철벽으로 둘러싸인 제국의 심장부를 향했다. 그곳은 오염되지 않은 대기와 풍요로운 식량, 그리고 안락한 잠자리가 보장된 곳이었다. 평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죽음 위에서 쌓아 올려진 탐욕의 성.
“뭘 그렇게 쳐다봐요, 강민 오빠.” 은아가 찬의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녀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깨진 유리 조각으로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며 주변을 살폈다. “어차피 우린 저 철벽 안으로는 못 들어가. 설령 저 감염자들을 다 죽인다 해도, 제국 놈들이 우리를 굶겨 죽이거나 총으로 쏴 죽이겠지.”
강민은 은아의 말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 오래전, 이 세계를 덮친 대재앙 이후 잔존한 인류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거대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들이 수호한 것은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과 안락뿐이었다. 바깥 세상은 감염자들의 피와 살로 오염되었고, 살아남은 평민들은 제국의 착취와 무관심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감염자보다 제국을 더 두려워했다.
그날 저녁, 세 사람은 허름한 은신처로 돌아왔다. 낡은 상자들이 쌓여 만들어진 임시 바리케이드 안은 언제나 스며드는 한기와 불안으로 가득했다. 다른 생존자 몇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지치고 메마른 얼굴들이었다.
“오늘은 뭘 건졌어?” 나이 든 영감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찬은 들고 있던 작은 배낭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녹슨 통조림 몇 개와 깨진 라디오 부품 따위가 전부였다. “젠장, 이젠 쥐새끼 한 마리도 찾아보기 힘들어. 제국 놈들이 지난주에 보급선 지킨다고 주변을 다 태워버려서.”
“보급선이라니.” 강민이 비소를 흘렸다. “그놈들의 보급선은 언제나 제국 병사들의 배를 채울 뿐이었지. 우리에게 온 건 잔반도 안 됐어.”
그때,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희미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쳤다. 엔진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쿵, 쿵 하는 둔탁한 진동과 함께 육중한 장갑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위에는 제국의 깃발이 펄럭였고, 무장한 병사들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놈들! 또 뭘 빼앗으러 온 거야?” 찬이 주먹을 꽉 쥐었다.
장갑차는 평민들이 모여 사는 구역의 한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던 작은 식량 창고 앞에 멈춰 섰다. 곧이어 병사들이 창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더니, 얼마 되지 않는 곡식 자루들을 밖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평민들이 웅성거리며 다가갔지만, 병사들은 무자비하게 총을 겨누며 위협했다.
“안 돼! 그건 우리 식량이야!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한 여인이 아이를 안은 채 절규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계속해서 식량을 약탈했다.
강민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과거 제국 병사였던 시절, 그는 명령에 따라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억압했다. 그러나 그 어떤 순간에도 이토록 노골적이고 무자비한 약탈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감염자보다 더한 약탈자들.
“이봐, 강민 오빠! 저렇게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찬이 분을 참지 못하고 강민을 흔들었다.
은아가 찬의 팔을 잡았다. “지금은 안 돼, 찬. 저들을 당해낼 수 없어. 괜히 나섰다가 다 죽을 거야.”
강민은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단호했다. 장갑차 위에 서 있던 제국 장교, 카이로스 제독은 강민의 등장에 콧웃음을 쳤다. 그는 과거 강민의 지휘관이었지만, 강민이 평민 편에 서기로 한 뒤로는 그를 벌레 보듯 무시했다.
“오랜만이군, 반역자 강민. 아직도 이런 구더기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있었나?” 카이로스 제독이 비웃었다. “어쩌겠나. 제국도 먹고 살아야지. 너희 같은 하찮은 자들이 뭘 안다고 감히 우리를 방해하는가?”
강민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먹고 산다? 당신들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어. 우리가 먹을 것이 없으면, 감염자들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당신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야.”
“그게 너희의 운명이다, 하등한 것들.” 카이로스 제독이 총을 뽑아 강민의 머리에 겨눴다. “이 한심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건 오직 강한 자들뿐. 제국만이 희망이다. 너희는 그저 제국을 위한 소모품에 불과해.”
그 순간, 강민의 눈에 결의가 번뜩였다. 그는 카이로스의 총구를 피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소모품? 우리는 당신들의 노리개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강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편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카이로스 제독의 머리를 스쳤다. 날아든 것은 다름 아닌 찬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다른 평민들도 돌멩이를 줍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감히! 이 벌레 같은 놈들이!” 카이로스 제독이 격분하여 총을 발사하려 했지만, 강민은 이미 몸을 날려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강민은 전직 제국 병사였다. 비록 고된 삶으로 몸이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의 전투 기술은 녹슬지 않았다.
“은아! 찬! 모두 도망쳐! 그리고 소리쳐!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라고!” 강민이 외쳤다.
은아와 찬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강민의 의지를 이해했다. 그들은 다른 평민들을 이끌고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강민은 카이로스 제독과 몸싸움을 벌이며 시간을 벌었다. 병사들이 강민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는 마치 짐승처럼 날카롭게 움직이며 그들을 제압했다. 한때 그가 몸담았던 제국의 병사들을 상대로, 그는 처음으로 진정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몇 분 후, 강민은 쓰러진 병사들 사이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났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카이로스 제독은 이미 도망치듯 장갑차에 올라타 자리를 피한 뒤였다. 제독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좋다! 감히 제국에 맞서려 들다니! 이 지역을 불태워 버릴 것이다! 모두 죽여라!”
장갑차의 기관총이 불을 뿜으며 주변을 향해 난사하기 시작했다. 강민은 간신히 몸을 피해 폐허 속으로 숨어들었다. 총알은 그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폐허 곳곳에서 들려오는 평민들의 함성 소리. “더 이상 당하지 않는다! 제국에 맞서 싸운다!”
강민은 피 묻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억압받던 자들의 분노가 마침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폐허 속을 달렸다. 감염자들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지만, 지금은 제국의 총탄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그래, 시작이다.’
강민은 어둠 속에서 은아와 찬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낡은 표지판 아래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은아의 손에는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라디오 부품이 들려 있었고, 찬의 얼굴은 흙투성이였지만 눈빛만은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젠장, 저놈들 미쳤어! 모든 걸 태우고 있어!” 찬이 씩씩거렸다.
“하지만 저 소리 들려? 오빠 말대로 사람들이 소리치고 있어!” 은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허 곳곳에서 작은 반항의 불꽃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돌멩이가 날아가고, 낡은 몽둥이가 휘둘러지고, 감히 제국에 맞서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젠 숨는 것도 지겹다.” 강민은 말했다. “저놈들은 우리를 소모품으로 여겼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의 불꽃이 될 거야. 제국의 차가운 심장을 태워버릴 불꽃.”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멀리 빛나는 제국의 철벽을 향했다. 그 빛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 탐욕의 상징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이야.” 은아가 손에 든 라디오 부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흩어져 있던 이 작은 불꽃들을 하나로 모을 불씨.”
찬은 강민과 은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서, 뭘 할 건데? 저 제국의 철벽을 맨몸으로 부술 거야?”
강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찬. 우리는 철벽을 부수는 대신, 그 안에 있는 탐욕을 불태울 거야. 저놈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아야 해.”
그의 뇌리에는 제국의 심장부에 있는 거대한 식량 저장고와 무기 공장, 그리고 그들을 움직이는 에너지원이 떠올랐다. 그것들이야말로 제국의 근간이었다. 그것을 건드리면 제국은 흔들릴 것이다.
“정보가 필요해. 제국 내부의 정보.” 은아가 말했다. “어떻게 감염자를 뚫고, 제국 병사들의 눈을 피해서 정보를 얻어올 거지?”
강민은 미소를 지었다. 피와 먼지로 얼룩진 얼굴이었지만, 그 미소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없었다. “나는 저 안에 있었던 사람이야. 아직 기억하는 것이 많아.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어둠 속에서, 폐허의 작은 불꽃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굶주림과 분노, 그리고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타오르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의 빛나는 철벽 아래, 억압받던 평민들의 반란이 그렇게, 작은 속삭임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감염자들의 울음소리가 자장가처럼 멀리서 들려왔지만, 그들의 심장 속에는 새로운 시대의 웅장한 서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소모품이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