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 마법 학원의 밤은 늘 고요했다. 수정처럼 맑은 달빛이 뾰족한 첨탑과 고색창연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비추고, 수천 년 묵은 마법의 기운이 공기 중에 옅게 흘러 다녔다. 하지만 강하준에게는 그 고요함이 때때로 뼈를 에는 듯한 정적, 뭔가 감추어진 듯한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대도서관의 낡은 마법 서적들 사이에서 겨우 집중력을 유지하려 애쓰던 하준은, 진동을 느꼈다. 웅. 웅.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발밑에서부터 올라와 책상 위 펜 끝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옆자리에서 두꺼운 마법진 해석학 책을 뒤적이던 동급생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을 뿐, 아무 말 없이 다시 책에 코를 박았다.
“또 시작이네, 지하 보일러실 문제인가?” 하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지하 보일러실? 하준, 학원 지하에 그런 게 있었어? 우리 학원은 중앙 마력로로 모든 에너지를 공급받는다고.”
하준은 순간 말을 잃었다. 유진의 말대로였다. 이 학원의 모든 마법적 시설은 지하 깊숙이 잠든 고대 마력로의 힘으로 움직였다. 그 사실은 기초 마법학 개론 첫 시간에 배우는 상식이었다. 보일러실이라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끔씩 이런 진동과 함께 아주 희미한 기계음 같은 것을 들었다. 아주 어릴 때, 고향 마을 공장에서 듣던 그런 소음.
“아, 그래. 그랬지.” 하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든 연필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헛들었나 봐.”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준은 그녀의 시선이 떠나자마자 자신의 책상 아래로 몸을 기울였다. 진동은 여전했다. 아니, 조금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둔중하고 일정한 울림.
이런 현상은 그가 학원에 전학 온 지 두 달째 되던 날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학원 건축물이 워낙 오래되어서겠거니 했다. 하지만 진동은 규칙적이지 않았고, 가끔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지하 어딘가에서 살아있는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며칠 전, 그는 진동과 함께 희미한 섬광을 보았다. 잠시 끊겼던 학원 내부의 마법등이 다시 켜지는 순간, 지하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의 착각이었을까?
밤 열한 시, 대도서관 폐관 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하나둘 짐을 챙겨 나섰다. 하준은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있다가, 유진마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책을 꽂는 척하며 도서관의 구석진 곳, 일반에 개방되지 않은 마법 기록 보관소로 이어지는 철제 문을 슬쩍 보았다.
그 문은 늘 잠겨 있었다. 학원에서도 손꼽히는 원로 교수들만이 출입이 허용되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하준은 그 문 너머에서 진동이 가장 크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은밀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에는 마법등의 희미한 빛만이 흐릿하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무도 없었다. 하준은 늘 가지고 다니던 작은 마력 탐지 수정구를 꺼냈다. 수정구는 철제 문에 가까워질수록 붉은빛을 띠며 미세하게 떨렸다. 평범한 마력 흐름과는 다른, 뭔지 모를 억눌린 힘이 느껴지는 듯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지만, 하준은 열쇠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문에 손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금속 너머로 쿵, 쿵, 쿵. 진동이 선명하게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그리고 진동과 함께, 아주 희미하게, 낮게 깔린 윙-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흡사 거대한 톱니바퀴가 천천히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같았다.
하준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마법 학교 지하에 웬 기계음? 게다가 저토록 거대한 진동을 일으킬 만한 장치라면, 학원 전체가 그 존재를 알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제외하고는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결심했다.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날 밤, 그는 학원 지도를 펼쳐 들고 지하 통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수업이 끝난 늦은 밤, 그는 자신의 방 창문을 통해 몰래 학원 밖으로 나섰다. 학교 주변의 숲을 우회하여, 그는 학원 지하 깊숙한 곳으로 통한다고 알려진, 하지만 아무도 발길을 들이지 않는 폐쇄된 수리 통로 입구를 찾아냈다.
오랜 시간 방치된 통로는 습하고 어두웠다. 눅눅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금속의 비릿한 향이 섞여 있었다. 손에 든 마법등이 겨우 시야를 확보해 주었지만, 빛은 이내 어둠에 먹혀들었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점점 더 깊이 내려갈수록 통로는 인공적인 느낌으로 변해갔다. 흙벽은 단단한 석재와 녹슨 철근으로 바뀌었고, 이따금씩 거대한 강철 문이 길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대부분은 낡아서 잠금장치가 무용지물인 상태였다. 하준은 자신이 단순한 폐쇄 통로가 아니라, 뭔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다 버려진 곳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가장 깊은 곳.
하준은 좁은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그의 마법등 불빛이 미치는 곳 너머로 거대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자연적인 동굴도, 마법적인 성소도 아니었다. 거대한 강철 기둥들이 천장을 지탱하고, 알 수 없는 배관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거대한 기계 기름 냄새와 함께 묵직한 오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존재가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것은 거대했다. 학원의 가장 높은 첨탑만큼이나 육중하고 웅장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생명체는 아니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검은색 금속 외장 위로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마치 수십 개의 눈처럼 보이는 붉은색 수정 렌즈들이 온몸에 박혀 있었다.
거대한 강철의 골렘, 아니, 차라리 고대의 거신병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것은 팔짱을 낀 채 고요히 서 있었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간을 압도하는 듯했다. 마치 잠들어 있는 거대한 맹수 같았다.
하준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마법으로 가득 찬 아르카디아 학원 지하에 숨겨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이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순수한 기계, 철과 강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병기였다.
그의 마력 탐지 수정구는 미친 듯이 붉게 번뜩이며 거의 폭발 직전처럼 뜨거워졌다. 거신병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마력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그리고 어딘가 섬뜩한 종류의 힘이었다.
“이게… 대체….”
그 순간, 거대한 정적을 깨고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강하준.”
하준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자 속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학원장 ‘엘도라 드 아르카디아’였다. 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눈빛은 심연처럼 깊었다. 그녀의 손에는 거대한 거신병을 향해 희미하게 빛나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학원장님… 이게… 뭡니까?” 하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학원장은 아무 말 없이 거신병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오랜 친구를 보듯, 애증이 담긴 시선으로 거신병의 심장부에 박힌 붉은 수정 렌즈를 응시했다.
“이것이 바로…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의 진정한 심장이자, 가장 깊은 곳에 묻힌 금기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신병의 온몸에 박힌 붉은 수정 렌즈들이 일제히 섬뜩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체에서 낮고 웅장한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고, 그 진동은 하준이 여태껏 느껴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온 세계를 집어삼킬 듯한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리고 거신병의 복부 중앙에서, 거대한 강철 패널이 스르륵 열리며 안쪽의 어둠을 드러냈다. 그 안에서, 핏빛 섬광과 함께,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계와 생명체의 경계가 모호한, 섬뜩하도록 완벽한 형태로 다듬어진 거대한 조종석이었다.
그 순간, 하준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오래된 학원 괴담이 있었다.
*지하 가장 깊은 곳에는 ‘별들의 영혼’을 먹고 사는 거대한 괴물이 잠들어 있다.*
*그 괴물의 심장이 뛸 때마다, 학원의 위대한 마법이 흔들린다.*
“금기…라고요?” 하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학원장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래. 이 금기는 학원의 모든 마법을 초월한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콰아앙!
거신병의 어깨 장갑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안에서 거대한 마력 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빛나는 수정 렌즈들이 하준을 향해 돌아섰다. 학원장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내면에는 알 수 없는 광기와 결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하준은 본능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이 거신병은, 단순한 수호자가 아니었다. 이 학원 자체가 숨기고 있는 거대한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된 광기가 여기 지하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거신병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나며 하준을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 발을 들인 곳이, 되돌릴 수 없는 지옥의 입구임을 깨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