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밤의 장막이 서울의 고층 빌딩 숲을 감싸 안았다. 이현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터벅터벅 복도를 걸었다. 스무 평 남짓한 그의 아파트, 1403호. 이곳은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지루한 회의와 상사의 잔소리, 치솟는 물가에 대한 걱정 따위를 모조리 집어삼키는 검은 구멍.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삑- 삑- 삑- 삑- 철컥.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그를 반기는 건 침묵뿐이었다. 퀴퀴한 퇴근길 지하철 냄새를 털어내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젠장, 오늘도 망할 야근이었군.”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겉옷을 벗어 던졌다. 옷걸이에 거는 대신 소파 등받이에 걸쳤다. 대충 벗어놓은 신발은 발로 툭툭 밀어 신발장 밑으로 집어넣었다. 주린 배를 채우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빈 공간, 달랑 몇 개의 음료 캔과 김치통만이 보였다.

“라면이 최고지.”

냉장고 문을 닫고 찬장으로 향했다. 냄비와 봉지 라면 두 개를 꺼내 싱크대에 올렸다. 물을 끓이려는 찰나, 거실 쪽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응?”

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불 꺼진 거실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피곤해서 헛것을 들었나? 신경 쓰지 않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파란 불꽃이 솟아오르고, 물 끓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

라면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동안, 이현은 습관처럼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려는데, 테이블 위 음료 캔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설마.’

그는 눈을 비볐다. 분명히 움직였다. 아주 조금, 캔 바닥이 테이블 위를 스치듯. 다시 봐도 그대로였다. 착각이겠지. 요즘 잠을 잘 못 잤으니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한창 인기인 무협 웹소설을 켰다. 주인공이 비급을 얻어 절세 고수가 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그의 무료한 일상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크으, 역시 이 맛이지.”

몰입하여 읽던 중, 부엌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철렁했다.

“뭐야?”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가스레인지 위 라면 냄비는 그대로 보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싱크대 옆 식기 건조대에 놓여 있던 컵 하나가 깨져 있었다.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조각들.

“이게 무슨…”

이현은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건드리지 않았는데. 누가 들어온 건가? 현관문은 분명히 잠겨 있었다.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공기는 차갑고 묵직했다. 소름이 돋았다.

“젠장, 도둑인가? 설마 귀신?”

입술이 바싹 말랐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기 위해 빗자루를 찾았다.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던 중, 등 뒤에서 ‘끼이이익-‘ 하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거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14층이다. 그리고 창문은 분명히 닫혀 있었다.

“말도 안 돼…”

창밖으로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그의 눈에 비친 건 텅 빈 바깥 풍경뿐이었다. 하지만 뭔가, 아주 잠시 동안, 희미한 그림자 같은 것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피곤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 모르니 불을 모두 켰다. 환하게 밝아진 아파트는 아까보다 덜 무서웠지만, 여전히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가 창문을 닫으려 다가가자, 이번에는 거실 테이블 위 화병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쿵! 소리와 함께 천장에 부딪혔다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났다. 흙탕물과 꽃잎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 이건… 도대체…”

이현은 뒷걸음질 쳤다.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물건들은 스스로 움직였다. 그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부엌 쪽에서 날카로운 칼날 소리가 울렸다. 챙강! 챙강!

“설마!”

이현은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위, 식칼 두 자루가 공중에서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검객이 검무를 추는 것처럼 빠르고 정교하게. 식칼이 부딪힐 때마다 섬광이 터지는 듯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귀를 찢을 듯했다.

놀랍게도 칼날의 움직임은 단순한 무작위가 아니었다. 묘한 규칙성과 흐름이 있었다. 마치 고대의 무공 비급에 나오는 검법처럼, 일정한 궤적을 그리며 춤추고 있었다. 칼끝이 허공을 가르자, 마치 실재하는 검기라도 되는 양 차가운 기운이 번져나갔다.

“무… 무공?”

이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가 늘 읽던 무협 소설 속의 한 장면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었다.

한 자루의 식칼이 그의 눈앞에서 멈췄다. 칼끝이 정확히 그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차가운 강철의 기운이 피부에 와닿았다.

그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를 노려보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살기(殺氣). 무협 소설에서 읽었던 바로 그 살기였다.

“젠장!”

이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동시에 식칼이 번개처럼 날아와 그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챙! 식칼은 뒤쪽 벽에 박혔다. 깊숙이 박힌 칼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했다. 이건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건… 공격이었다.

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의 형광등이 터져버렸다. 깜빡거리던 불빛이 완전히 꺼지며, 아파트는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겼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한, 살아있는 기운이 느껴졌다.

***

이현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무언가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서늘하고 묵직한, 설명할 수 없는 기운.

그때,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손바닥 한가운데에 뭔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거실장의 서랍들이 차례로 열리고 닫혔다. 쾅! 쾅! 쾅!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그리고 마지막 서랍이 열리는 순간, 안에서 오래된 나무 상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바닥에 떨어지며 뚜껑이 열리고, 안에서 낡은 비단 천에 싸인 작은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손바닥만 한 작은 검은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검이 바닥에 놓이는 순간, 이현의 손바닥에서 솟아나던 열기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의 눈앞에 환영처럼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흑백의 잔상. 낡은 도복을 입은 남자가 허공에서 검을 휘두르는 모습.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 빠르고 유려해서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였다.

환영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이현은 숨을 헐떡였다. 그의 손바닥은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고, 심장은 이제 통증마저 동반하며 고동쳤다.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보이지 않는 존재의 ‘살기’가 그를 덮쳐왔다. 이번에는 더 강하고, 직접적이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듯.

“크윽!”

이현은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바닥에 떨어진 작은 검을 향했다. 손가락이 검의 차가운 손잡이에 닿는 순간, 찌릿하는 전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검은 그의 손에서 더욱 강렬한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빛과 함께,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와 영상이 폭풍처럼 밀려들어왔다.

*수많은 무공의 초식들. 기의 흐름. 심법. 검의 이치…*

“이게… 뭐야…”

이현은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손에 쥐어진 검은 마치 그의 일부인 양 편안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쾅, 쾅, 쾅 하는 소음들이 일순간 잠잠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의 변화를 주시하는 것처럼.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을 깨고, 희미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돌아왔느냐… 나의 계승자여…”

목소리는 고통스럽고, 동시에 깊은 갈망을 담고 있었다.

이현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작은 검이 푸른빛을 더욱 강렬하게 뿜어내며,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