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나, 황금 제국의 수도 ‘칼렌시아’의 뒷골목은 어둡고 눅진했다. 길모퉁이에 자리한 조그만 빵집 ‘달콤한 도피처’의 주인, 아리(26세)는 이른 아침부터 밀가루 반죽을 치대며 열기로 가득 찬 주방에서 땀을 흘렸다. “젠장, 또 설탕세가 올랐다고? 이쯤 되면 빵에 금가루라도 뿌려야겠어.” 덧문에 붙은 제국의 새 공고문을 째려보며 아리가 투덜거렸다. 그녀의 손은 리드미컬하게 반죽을 때리고 밀었고, 그 움직임에는 오랜 세월 제국의 횡포에 시달린 민초들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

빵집 문이 달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섰다. 퀴퀴한 흙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외투 차림의 사내였다. 그의 눈빛은 짙은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단단함은 숨길 수 없었다. 사내는 가게 안을 쓱 훑어보더니, 갓 구워져 나온 빵들의 향기에 살짝 코를 찡긋했다.

“여기,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좀 구할 수 있습니까?” 사내가 묻는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아리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아이들? 요 며칠 아이들 코스프레하고 먹을 거 얻어가려는 덩치 큰 양반들이 부쩍 늘었더군요. 설마 당신도?”

사내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피곤함과 동시에 어딘가 익살스러운 기운을 담고 있었다. “나는 덩치가 좀 크지만, 내 동료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은 정말 배고픕니다.”

“동료? 길드라도 되는 모양이지?” 아리는 콧방귀를 뀌며 어제 팔다 남은 굳은 빵 몇 조각을 대충 봉투에 담았다. “이게 전부예요. 돈은 없어도 공짜는 없으니까.”

사내는 아리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들더니, 품속에서 구겨진 은화를 몇 개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고맙습니다. 아가씨의 빵은… 굳어도 맛있군요.”

“굳은 빵을 돈 주고 사 먹으면서 그 말은 모욕 아닌가요?” 아리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게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아리는 문득 그의 어깨 뒤로 보이는 외투 아래, 칼집에 번뜩이는 강철 조각을 보았다. ‘뭐야, 그냥 평범한 거지떼가 아니었잖아?’

그날 밤, 아리는 밀린 장부 정리를 하며 창밖을 내다봤다. 제국군의 순찰대가 횃불을 들고 거리를 지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쯤, 다시 빵집 문이 달랑거렸다. 낮의 그 사내였다. 이번에는 외투가 젖어 있었고, 빗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또 아이들 때문입니까?” 아리가 반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사내는 봉투를 건넸다. 낮에 그녀가 준 빵 봉투였다.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군요. 당신은… 이대로 제국의 횡포를 보고만 있을 겁니까?”

아리는 봉투를 받아 들고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무슨 꿍꿍이에요? 제국군 끄나풀이면 당장 나가요.”

“나는 제국에 맞서는 자입니다. 이름은 진우.” 진우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고, 결의에 차 있었다. “당신의 빵집이 필요합니다. 정보를 교환하고, 동지들을 모으며, 배고픈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은밀한 거점으로서.”

아리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내 빵집이요? 농담도 참. 난 그냥 빵 굽는 사람이에요. 무슨 거점? 반란 같은 거창한 말은 나와는 상관없어요.”

“상관없다고요?” 진우가 한 발짝 다가섰다. “당신이 굽는 빵에 붙는 터무니없는 설탕세, 밀가루세는요? 매달 제국군에 상납해야 하는 공물은요? 매일 밤 배를 ꋷ고 잠드는 아이들은요? 그 모든 것이 당신과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리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진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상관있죠. 그래서 매일 이렇게 욕하고, 투덜거리고, 한숨 쉬는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갈 수는 없잖아요.”

“칼은 우리가 들 겁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빵으로.” 진우는 테이블 위의 반죽용 밀가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신의 빵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지친 영혼을 위로합니다. 그 어떤 선동보다 강력할 수 있습니다.”

아리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말에 설득당해서라기보다는, 그의 눈에 비친 확고한 신념과, 그에게서 느껴지는 피곤함 속의 간절함 때문이었다. “좋아요. 딱 일주일만. 대신, 내 빵값은 제대로 지불해야 할 거예요.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니까.”

그렇게 ‘달콤한 도피처’는 낮에는 평범한 빵집, 밤에는 ‘새벽의 그림자’라는 반란 조직의 은밀한 거점이 되었다. 진우는 매일 밤 조직원들과 함께 아리의 빵집으로 몰려들었고, 아리는 그들에게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수프를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티격태격 로맨틱 코미디가 시작되었다.

“진우 씨, 당신 동료는 왜 맨날 식빵을 다섯 개씩 먹어요? 곰인가요?” 아리가 쟁반을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뚱딴지는 원래 좀 많이 먹습니다. 힘쓰는 일이 많아서요. 아리 씨 빵이 맛있기도 하고.” 진우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칭찬을 가장한 돌려 까기입니까? 그럼 뚱딴지는 힘쓰고, 당신은 뭐 해요? 여기서 작전 짠다고 밤새도록 펜만 굴리는데, 뾰족이처럼 똑똑한 건지도 모르겠고.”

“저는… 총대 메는 일이죠. 그리고 아리 씨에게 잔소리 듣는 일도.” 진우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아리는 픽 웃었다. “아니, 빵집이 놀이터인 줄 알아요? 그리고 당신, 밀가루통 옆에 칼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두면 어떡해요? 이거 위생상 문제라고요!”

“아, 죄송합니다. 급해서.” 진우는 황급히 칼을 치웠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어설펐고, 아리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면서도 묘한 감정을 느꼈다. 강직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어느 날 밤,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진우는 아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제국군의 식량 보급 수레를 습격하여 빼앗긴 세금을 되찾아오자는 계획이었다. “제국군 보급로는 늘 삼엄합니다. 뾰족이가 알아낸 바로는, 뒷골목을 통하는 지름길이 있는데… 거기는 미로 같아서 길을 잃기 쉽습니다.”

“미로요? 이 골목에서 태어나 이 빵집에서 자랐는데, 내가 모르는 길이 있을 것 같아요?” 아리가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내가 지도를 그려줄게요. 아니, 내가 직접 길 안내를 할 수도 있지.”

진우는 놀란 눈으로 아리를 봤다. “위험합니다. 아리 씨는 이곳에서 가장 중요해요.”

“내가 없으면 보급 수레를 털어 와도 먹을 빵이 없는데, 뭐가 더 중요해요? 그리고 이 작전 성공하면 우리 빵집 매출에도 큰 도움이 될 텐데. 내가 가야지!” 아리는 기어코 진우를 따라나서겠다고 우겼다. 그녀의 단호한 모습에 진우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작전 당일, 아리는 밀가루 자루를 짊어진 척 위장하여 진우와 함께 나섰다. 어두운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치며 그들은 제국군 보급 수레가 지나갈 경로를 미리 파악했다. 아리는 마치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을 거침없이 안내했고, 진우는 그런 아리의 능숙함에 감탄했다.

“이 길이 가장 빠르고, 저쪽 구석에는 감시병의 시야를 가리는 담벼락이 있어요. 그리고… 저기, 저 냄새 맡아봐요.” 아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킁킁거렸다. “아마 제국군 보급 수레에 들어갈 고급 치즈 냄새일 거예요. 내가 개발한 신메뉴 ‘폭군 치즈 타르트’에 딱인데.”

진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작전 중인데 음식 타령입니까? 아리 씨는 정말….”

“작전 중에도 먹고살 걱정은 해야죠! 그리고 내 빵집 레시피를 위한 첩보 활동이기도 하고.”

바로 그때, 멀리서 철컥거리는 수레바퀴 소리와 함께 제국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진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작전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진우와 뚱딴지, 뾰족이 등 ‘새벽의 그림자’ 조직원들은 아리가 알려준 지점을 따라 보급 수레를 기습했다. 아리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빵집에서 가져온 ‘특제 방해용 끈적 달콤 빵’을 던졌다. 빵은 제국군 병사들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시야를 가렸고, 그들은 끈적한 빵을 떼어내느라 혼비백산했다.

“이게 무슨… 빵이 왜 이렇게 끈적거려?!”

“윽, 눈에 들어갔다!”

혼란을 틈타 진우의 동료들은 재빠르게 수레를 제압했다. 그러나 한 병사가 아리를 발견하고 칼을 휘둘렀다. “꼼짝 마라, 반란군의 쥐새끼!”

아리는 얼어붙었다. 그때 진우가 번개처럼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병사의 칼을 막아섰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밤하늘에 울렸다. “감히 우리 아리 씨에게 손대려 해?!”

진우의 목소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는 칼날을 쳐내고 병사를 제압했다. 아리는 그의 뒤에 서서, 그의 넓은 어깨와 거친 숨소리를 느끼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남자, 의외로 듬직하잖아….’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빼앗겼던 세금과 함께 귀한 식량들이 민초들에게 돌아갔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새벽의 그림자’의 명성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작전 후, 아리의 빵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진우는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아리의 옆에 앉았다. “괜찮습니까? 다칠 뻔했어요.”

“덕분에 살아났죠, 뭐.” 아리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귓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 칼놀림은 어디서 배웠어요? 빵만 굽는 줄 알았더니.”

진우는 피식 웃었다. “빵만 굽는 아리 씨 덕분에 나도 칼을 더 잘 휘두르게 된 겁니다.”

“이게 다 내 덕이라는 말이에요?”

“그럼요. 당신의 빵이 나에게 힘을 주고, 당신의 잔소리가 나를 채찍질하죠.” 진우가 아리의 손에 쥐여진 굳은 빵 조각을 바라봤다. “가끔은… 당신의 빵처럼, 겉은 딱딱해도 속은 따뜻한 사람 같아요.”

아리는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슨… 빵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언제 딱딱했다고요? 난 항상 부드러웠지!”

“그럼요, 그럼요.”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의 손을 슬쩍 잡았다. 그의 손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아리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그래서, 다음 작전은 뭐예요?” 아리가 물었다.

진우는 그녀의 손을 꼭 쥐며 웃었다. “다음 작전은… 이 제국을 달콤하게 뒤집어엎는 겁니다. 당신의 빵과 함께라면 가능할 거예요.”

아리는 진우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피곤함과 함께 강한 신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에 대한 묘한 감정까지.

“좋아요. 그럼 다음 작전은 ‘폭군 제국 전복 기념 케이크’를 만드는 걸로 하죠.” 아리가 피식 웃으며 진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들의 손에는 희망과 사랑, 그리고 달콤한 반란의 끈끈한 서약이 담겨 있었다. 제국은 아직 건재했지만, 칼렌시아의 뒷골목, 달콤한 도피처 빵집에서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주 달콤하고, 아주 뜨거운 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