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핏빛 맹세의 투기장
“콰아아아앙!”
수만 명의 함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고대 신전의 돌바닥을 뒤흔들었다. 원형 투기장을 가득 메운 군중의 열기는 마치 거대한 화로 같았고, 그 한가운데에는 핏빛으로 물든 흙먼지가 회오리쳤다. 제국의 무인이라면 일생에 한 번은 꿈꾼다는 ‘천명대전(天命大戰)’. 그러나 강휘의 눈에는 그저 헛된 욕망과 거대한 속임수가 뒤섞인 아수라장으로 보일 뿐이었다.
“강휘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옆자리에서 작은 몸집의 하인 소년, 동구가 조심스레 물었다. 강휘는 고개를 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을 리 없었다. 이 거대한 제전의 이면에서 꿈틀거리는 어둠을, 자신만이 홀로 느끼는 듯했다.
투기장 중앙에서는 방금 막 경기가 끝났다. 승자도 패자도 아닌, 한 명의 무인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기이한 결말이었다. 패배한 쪽의 기가 너무도 급작스럽게 소진되며 육체가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모습은 이미 열흘간 이어진 대회에서 수차례 반복된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압도적인 승자의 기운에 육신이 버티지 못하고 소멸했다고 믿었지만, 강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소멸이 아니었다. 흡수였다.
승자인 ‘무쌍궁(無雙弓)’ 문파의 젊은 고수, 백련화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활을 거두었다. 백옥처럼 하얀 그녀의 손에는 방금 전까지 상대의 생기를 빨아들인 것 같은 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경기 시작 전의 그녀와 비교하면, 한층 더 빛나고 위험해진 모습이었다.
“후우… 백련화. 그녀의 무공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것인가.”
강휘는 중얼거렸다. 그녀의 무공은 분명 정통 무쌍궁의 초식이었으나,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이 섞여 있었다. 마치 차가운 강철검에 뜨거운 피가 스며든 것처럼.
동구가 곁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백련화 님의 ‘흡성대법(吸星大法)’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저러다간 정말… 천하제일인이 될 것 같습니다.”
흡성대법? 강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백련화의 무공은 흡성대법이 아니었다. 흡성대법은 기를 빨아들이는 사파 무공 중 하나지만, 백련화가 사용하는 힘은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생명 그 자체를 뿌리째 뽑아내고, 그 정수를 제 것으로 만드는. 마치… 굶주린 존재가 먹이를 찾아 헤매는 것과 같은 탐욕스러운 힘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벌써부터 저렇게 생명력을 흡수해대니. 저 아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게야.”
강휘가 고개를 돌리자, 텁수룩한 흰 수염을 가진 노인 묵현이 특유의 허름한 도포 차림으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는 이 대회가 열린 이래로 늘 강휘의 곁에서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는 기인이었다.
“묵현 어르신, 또 무슨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려 하십니까?” 강휘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묵현은 껄껄 웃으며 투기장을 향해 턱짓했다. “저 대회가 무엇 때문에 열린 것 같으냐? 천하의 운명을 걸고, 무림의 정예들을 모아 겨루게 하는 이유. 명분은 ‘무림의 평화’니 ‘천하제일’이니 떠들지만… 허어, 진실은 저 바닥에 뿌려지는 피와 생명을 모으기 위함일 뿐.”
강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무슨 뜻입니까?”
“옛말에, 거대한 문을 열려면 거대한 제물이 필요하다 했지.” 묵현은 강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지금 저 투기장은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다. 태고적부터 잠들어 있던 ‘그것’을 깨우기 위한 제단이지. 피와 생명의 정기가 모일수록, ‘그것’의 눈이 서서히 뜨일 테고… 백련화 저 아이는, 어쩌면 저 자신도 모르는 채 ‘그것’의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어가는 중일지도 몰라.”
강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묵현의 말은 비현실적이었지만, 그의 직감은 이 노인의 말이 진실의 조각을 담고 있음을 알렸다. 이 대회에 참가한 모든 무인은, 승리든 패배든 상관없이 거대한 존재의 먹이가 되고 있었다.
장내에 다음 경기 주자들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리고 강휘의 이름이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다음 경기! ‘무명검문’ 강휘와 ‘철혈맹’ 단철!”
강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고, 묵현은 여전히 묘한 웃음을 지으며 강휘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심하거라, 강휘. 네 안에 있는 ‘그것’이 깨어나기 전에… 어쩌면 네가 먼저 잡아먹힐지도 모르니.”
묵현의 경고는 강휘의 귓가에 맴돌았다. ‘내 안에 있는 그것’이라니.
강휘는 투기장으로 내려섰다. 흙먼지가 발에 밟힐 때마다 기분 나쁜 축축함이 느껴졌다. 이전 경기에서 뿌려진 피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탓이었다. 맞은편에서는 ‘철혈맹’의 장로인 단철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전신이 갑옷처럼 단련된 근육질의 거인이었고, 그의 눈은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였다.
“흐흐흐… 무명검문이라.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군. 운 좋게 여기까지 올라왔겠지만, 여기서 너의 여정은 끝이다. 너의 생기는 내가 가져가겠다!”
단철은 거대한 강철 주먹을 쥐어 보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는 흙먼지를 뚫고 나올 듯한 압도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강휘는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의 검은 평범한 철검이었고, 그 위에는 이름조차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강휘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경기가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철이 우렁찬 포효와 함께 강휘를 향해 돌진했다. 그의 발걸음이 투기장 바닥을 부술 듯이 울렸다.
“강철벽파권!”
단철의 주먹은 마치 거대한 바위를 부수는 망치 같았다. 강휘는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고는 빠르게 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의 검은 마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유연하고 예측 불가능했다.
“파팟! 챙!”
강철 같은 단철의 팔을 스쳐 지나간 검은 작은 불꽃을 튀겼지만, 그의 단단한 육신에는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하하하! 겨우 이 정도냐? 간지럽군!” 단철은 비웃으며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공격은 더욱 거세지고 빨라졌다.
강휘는 계속해서 피하고 막아냈다. 그의 검술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절제되고 정교했다. 하지만 점점 밀리는 것은 강휘 쪽이었다. 단철의 공격에는 단순한 무공을 넘어선, 이 투기장의 기운을 빨아들인 듯한 불길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강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이것은… 생명력? 단철 역시 이 투기장의 영향을 받고 있어. 그의 힘은 단순히 육체의 힘이 아니야. 다른 이들의 정기를 흡수해 강해지고 있어!’
강휘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의 눈에 투기장 바닥의 혈흔들이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피가 마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보충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제단은 살아있는 무인들의 생명력을 먹고 자라는 거대한 포식자였다.
단철의 주먹이 강휘의 복부를 노리고 날아왔다. 강휘는 간발의 차이로 몸을 숙여 피했지만, 그의 귓가에 끔찍한 비명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단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 투기장 바닥에서 희생된 수많은 영혼들의 절규였다.
“크으윽!”
강휘는 무심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단철의 눈빛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그의 온몸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했다.
“이제 끝이다! 나의 피와 살이 되어라!”
단철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폭풍처럼 터져 나오며 강휘를 향해 쇄도했다. 그 기운은 강철 같은 압력을 동반하며, 강휘의 정신을 짓눌렀다. 강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라면 흡수당할 터였다.
그 순간, 그의 귓가에 묵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네 안에 있는 ‘그것’이 깨어나기 전에… 어쩌면 네가 먼저 잡아먹힐지도 모르니.’*
강휘는 이를 악물었다. 잡아먹힐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힘을 끌어냈다. 그것은 검의 기운도, 무공의 내공도 아닌, 차갑고도 투명한 무언가였다. 어릴 적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기이한 감각, 마치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처럼 항상 그와 함께하던 힘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은색으로 섬광처럼 빛났다.
“하아아앗!”
강휘는 외마디 기합과 함께 검을 거꾸로 쥐고 투기장 바닥에 박았다. ‘콰직!’ 돌바닥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검을 통해 그의 내면에서 끌어낸 투명한 기운이 투기장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검붉은 기운으로 쇄도하던 단철의 공격이 멈칫했다. 그의 발밑에서부터 차가운 한기가 솟아올라 그의 육체를 덮쳤다. 단철은 당황한 듯 몸을 떨었다. 그의 눈에 비친 강휘는 이미 이전의 무인이 아니었다. 은색 섬광이 감도는 눈빛은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했고, 그의 주변에는 투명하지만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 듯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네… 놈은… 대체…!”
단철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몸을 감싸던 검붉은 기운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 기운이 투명한 한기에 흡수당하는 듯했다. 마치 어둠이 빛에 의해 밀려나는 것처럼.
강휘는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검 끝에서는 차가운 서리가 피어났다.
“진정한 어둠은… 먹이가 되지 않는다.”
강휘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투기장 전체를 얼어붙게 할 만큼 강력했다. 그는 단철을 향해 검을 겨눴다. 단철의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그의 육체는 이미 검은 혈관들이 튀어나온 기괴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 투기장의 어둠에 잠식되어가고 있는 증거였다.
강휘는 검을 휘둘렀다. 화려함 없는, 단 한 번의 움직임이었다.
“스스슥.”
차가운 검기가 단철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단철은 그 자리에 굳어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거대한 육체가 마치 모래성처럼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육체는 먼지가 되지 않고, 검은 재가 되어 투기장 바닥에 스며들었다. 그 재는 마치 목마른 대지가 물을 흡수하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투기장 전체가 침묵에 잠겼다. 수만 명의 관중들은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공포와 경외가 뒤섞여 있었다. 방금 그들은 단순한 무공 대결이 아닌, 미지의 공포를 목격한 것이었다.
강휘는 검을 거두었다. 그의 은색 눈빛은 다시 원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지울 수 없는 의문이 가득했다.
‘나는… 무엇을 사용한 거지? 그리고 묵현 어르신이 말한 ‘내 안에 있는 그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크르르르르릉…**
투기장 전체가 거대한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새겨진 고대의 문양들이 붉은빛을 띠며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투기장의 중앙, 강휘가 서 있던 바로 그 아래에서 검은 균열이 생기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균열 속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이 뿜어져 나왔고, 그 안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일제히 강휘를 응시하는 듯한 기괴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관중들의 함성이 아닌,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려 했지만, 투기장을 감싸던 거대한 벽에 보이지 않는 장막이 쳐진 듯 갇혀버린 상황이었다.
강휘는 발밑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을 내려다보았다. 묵현의 말이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태고적부터 잠들어 있던 ‘그것’을 깨우기 위한 제단이지.’*
드디어, ‘그것’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강휘 자신이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