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전생 (Isekai) 독립적인 단편 소설

회색빛 노을이 핏물처럼 하늘을 물들였다. 김진우는 눈을 깜빡였다. 온몸이 으스러질 듯 아팠고, 혀는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이곳은 어디지? 마지막 기억은,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졸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하철은커녕 그가 알던 어떤 풍경과도 달랐다. 삭막한 황토색 대지 위로 앙상한 철골 구조물들이 뼈대처럼 박혀 있었다. 한때는 고층 빌딩이었을 잔해들, 뿌리 뽑힌 듯 나뒹구는 아스팔트 조각들, 그리고 사방을 가득 채운 붉은 먼지.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타는 듯 아팠다.

“젠장… 여기가 어디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은 그림자조차 없었다. 다만 삐걱거리는 금속음과, 저 멀리서 울리는 정체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만이 고요를 깨트릴 뿐이었다. 그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어댔다. 이건 꿈이 아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차가운 공포가 목덜미를 휘감았다.

일단 물. 갈증이 너무 심했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허물어진 건물 잔해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파편과 녹슨 쇠 조각들이 널려 있었지만, 신발은 멀쩡했다. 웬일인지 그의 발에는 낡고 튼튼해 보이는 전투화가 신겨져 있었고, 몸에는 찢어진 야전상의 같은 것이 걸쳐져 있었다. 언제 이렇게 바뀌었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완전히 무너진 상점가 잔해가 나타났다. 붉은 먼지가 내려앉아 간판의 글자는 읽을 수 없었다. 그 사이에서 녹슨 배관 하나가 축 늘어져 있었고, 그 끝에서 투명하지만 탁한 액체가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진우의 눈이 번뜩였다. 물이다! 그는 달려가 배관 아래에 손을 모았다. 한 방울, 한 방울… 그의 손바닥을 채우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도 갈증은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겨우 한 모금 분량의 물을 모았을 때, 그는 그걸 꿀꺽 삼켰다. 흙냄새와 비린내가 섞인 맛이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생명수 같았다.

“한 모금으로는… 택도 없지.”

그는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찢어진 천 조각이 하나 나왔다. 자신의 낡은 야전상의 소매를 찢어 만든 듯한 천이었다. 그는 배관 아래에 천을 깔아두고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주변을 뒤져보기로 했다. 혹시 먹을 만한 것이라도 있을까.

잔해 속을 헤치며 걷다 보니, 기괴한 형상의 식물들이 눈에 띄었다. 잎은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고, 줄기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열매라기보다는 기포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독기가 느껴졌다. 감히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젠장, 정말 아무것도 없네.”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때, 그의 눈에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이 들어왔다. 무너진 편의점의 잔해였다. 유리문은 박살 나 있었고, 선반은 뒤틀려 있었지만, 그 안에서 찌그러진 깡통 몇 개가 굴러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깡통을 집어 들었다. 글자는 완전히 지워져 있었지만, 내용물은 비스킷 같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유통기한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깡통을 발로 밟아 찌그러뜨려 겨우 열었고, 내용물을 입에 넣었다. 눅눅하고 시큼한 맛이 났지만, 이것 역시 지금 그에게는 진수성찬이었다.

비스킷 몇 조각으로 겨우 허기를 달래는 동안, 해는 완전히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늘은 이제 핏빛이 아니라 완전한 암흑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어둠과 함께,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한기였다.

그는 다시 배관으로 돌아왔다. 천 조각은 탁한 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천을 짜서 물통처럼 생긴 찌그러진 깡통에 물을 담았다. 그리고 밤을 보낼 만한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까 지나쳤던 완전히 무너진 건물이었다. 그나마 벽이 남아있는 곳을 찾아내 벽돌과 널빤지 조각들로 입구를 대충 막았다. 완벽한 은신처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바람은 막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잔해 더미 위에 웅크리고 앉아,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자신이 아는 세계는 아니었다. 마치 멸망한 행성 같았다. 이세계 전생?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남아서, 이곳이 어디인지, 왜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의 귓가에 정체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이전보다 더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진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젠장, 김진우. 정신 차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그는 폐허에서 주운 녹슨 철근을 꽉 움켜쥐었다. 손잡이 부분에 찢어진 천을 감아 그립감을 높였다. 초라한 무기였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밤은 길고 위험했다. 쿵, 쿵. 발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무겁고 둔탁한 소리. 진우는 숨을 죽였다.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윽고 그의 은신처 코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짐승의 거친 숨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벽 사이의 틈으로 바깥을 엿봤다. 거대한 형체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였다. 털은 돌멩이처럼 단단해 보였고, 거친 피부는 울퉁불퉁했다. 짐승의 두 눈은 마치 핏빛처럼 번들거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것은 자신이 이전에 알던 어떤 생물과도 달랐다. ‘황폐 짐승’. 머릿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단어가 떠올랐다.

짐승이 코를 킁킁거렸다. 벽을 긁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진우는 철근을 더 꽉 쥐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만약 저 짐승이 벽을 부수고 들어온다면… 그때, 그는 결심했다. 살려면 싸워야 한다.

짐승이 벽의 약한 부분을 발로 걷어찼다. 쿵! 널빤지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그 사이로 짐승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진우는 이를 악물고 몸을 던졌다. 널빤지가 떨어져 나간 틈새로 철근을 휘둘렀다. 짐승의 눈을 겨냥했지만, 철근은 짐승의 단단한 피부에 부딪혀 팅, 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동시에 짐승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움찔하며 비틀거렸다. 진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철근을 든 손에 온 체중을 실어 다시 한번 짐승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콰아앙!

이번에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짐승의 거대한 몸이 흔들렸다. 짐승은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뒷걸음질 쳤다.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철근을 고쳐 잡았다. 짐승의 몸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확실히 타격을 준 것이다.

하지만 짐승은 이내 자세를 가다듬고 그르렁거렸다. 상처를 입자 더욱 흉포해진 모습이었다. 진우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저 짐승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무리다.

‘도망쳐야 해!’

그는 철근을 던지듯 휘둘러 짐승의 얼굴을 다시 한번 강타했다. 짐승이 비틀거리는 짧은 순간, 그는 몸을 날려 은신처의 다른 쪽, 널빤지 조각으로 가려진 작은 구멍을 통해 탈출했다. 땅바닥에 몸을 굴려 짐승의 추격을 피하며 건물 잔해 사이를 전력으로 질주했다.

뒤에서 짐승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의 폐는 터질 것 같았고,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죽음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짐승의 포효 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무너진 담벼락 뒤에 쓰러지듯 몸을 숨겼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호흡은 불규칙했다.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더 강해져야 해. 이대로는 안 돼.’

희미한 새벽빛이 동쪽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밤새 싸우고 도망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저 멀리, 가장 높은 건물 잔해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왠지 모르게 저곳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황폐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실마리가.

그는 다시 철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발밑에서 붉은 먼지가 스산하게 일었다. 그의 생존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