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석양의 마지막 조각이 가상현실 게임, <아르카나의 꿈>의 대도시 ‘에테르나’를 뒤덮을 무렵이었다. 도시 중앙에 우뚝 솟은 연금술사 협회의 탑, 그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삼엄하게 경비되는 ‘아이단 경의 마나 공방’에서 끔찍한 비극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에테르나 전역을 뒤흔들었다.
류신은 늘 그랬듯이 침착했다. 광장에 모여든 흥분한 시민들의 웅성거림도, 쉿쉿거리는 마나 증기 기관 소리도 그의 귀에는 그저 배경음악일 뿐이었다. 그는 푸른색 연금술사 로브를 입은 리엘, 아이단 경의 수석 제자가 공방 입구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지나쳤다. 옆에서는 연금술사 협회 경비대장 그라함이 거대한 강철 건틀릿을 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류신 님, 오셨군요.” 그라함은 류신을 보자마자 안도감과 동시에 절망감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건… 이건 밀실 살인입니다. 완벽한 밀실이에요.”
류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들었습니다. 아이단 경의 공방은 외부인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라함이 공방 문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이 문은 저희가 특수 마나 잠금 해제 기술로 겨우 열었습니다.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마법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그 어떤 외부 침입의 흔적도 없어요. 심지어 공방 외벽에 설치된 감지 마법진조차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엘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흐느꼈다. “아이단 경은… 그는 제게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새로운 마나 증폭 장치 개발에 몰두해 계셨죠. 아침에 찾아왔을 땐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비대장님께 연락드렸는데….”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류신은 리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공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묵직한 마나의 잔향이 공기 중에 가득했다. 원형의 공방 내부에는 복잡한 연금술 장비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중앙에는 마나 코어가 박힌 실험대가 있었고, 그 옆에 아이단 경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가슴팍에는 작은 얼음 조각이 박혀 있었다. 날카롭고 정교하게, 마치 레이저로 꿰뚫은 듯한 상처였다.
“사인은 명확합니다.” 그라함이 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순수한 마나 얼음으로 만들어진 단검 같은 것에 찔린 상처입니다. 하지만 범행 도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그리고… 이 방은 절대적인 밀실입니다.”
류신은 시신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시신 주변의 바닥에는 어떤 저항의 흔적도 없었다. 주변의 연금술 장비들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아이단 경의 손가락을 살폈다. 그의 손에는 마나 증폭 장치의 설계도가 쥐어져 있었다. 익숙한 설계도였다. 아이단 경이 몇 달째 공을 들이던 프로젝트였다.
“마지막까지 연구를 하고 계셨군요.” 류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방 전체를 훑었다. 둥근 벽면을 따라 빼곡히 늘어선 마나 증류탑, 증폭 장치, 냉각기와 시약 병들. 모두 정돈된 모습이었다. 외부와 통하는 창문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구조였다.
“범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라함이 답답한 듯 벽을 쳤다. “마법사들은 순간이동으로 침입할 수 없도록 이 공방 전체에 고위 마법 방어막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탐지 마법진도 반응이 없었고, 침입자의 마나 잔향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우리는 부수다시피 해서 들어왔죠. 이건… 불가능합니다.”
류신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공방의 천장은 돔 형태로 되어 있었다. 류신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멈췄다. 돔의 가장 높은 곳, 마나 코어가 박힌 실험대 바로 위쪽이었다. 아주 희미하게, 마치 서리가 내렸다 녹은 듯한, 육안으로는 거의 식별하기 어려운 얼룩이 보였다.
“아이단 경은 최근 어떤 실험에 몰두하고 계셨습니까?” 류신이 리엘에게 물었다.
리엘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나 증폭 장치요… 공간 마나 압축 순환 장치라고, 기존의 마나 흐름을 압축해서 강력한 힘을 만들어내는 장치였어요. 아직 시험 단계였지만, 정말 대단한 발명이라고 흥분하셨어요.”
“공간 마나 압축 순환 장치….” 류신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 장치는 이 공방의 마나 순환 시스템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나요?”
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치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방의 핵심 마나 정제 시스템과 연결해서 사용하셨어요. 초기에는 마나 압축 과정에서 에너지가 불안정해져서… 과부하를 막기 위한 비상 배출구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류신은 다시 천장의 얼룩을 응시했다. “비상 배출구 말입니까? 그것은 어디에 있었죠?”
리엘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장을 가리켰다. “저… 저기 돔의 가장 높은 부분에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외부 마법으로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어서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장치가 과부하될 것 같으면… 자동으로 잠시 열렸다가 닫히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류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단 경이 죽기 직전, 그 장치는 과부하 상태였습니까?”
그라함이 자료 패드를 열어 마나 흐름 기록을 확인했다. “마나 흐름 기록에 따르면… 아이단 경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 정확히 3분 17초 동안 이 공방의 마나 시스템에서 순간적인 압력 상승과 함께 미미한 에너지 유출이 감지되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아이단 경의 실험 과정 중 흔히 발생하는 현상으로 보고 간과했습니다.”
“간과했군요.” 류신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바로 범인이 공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아이단 경을 살해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류신에게 집중되었다. 리엘은 눈물 어린 눈으로, 그라함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방은 완벽한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류신은 천장의 희미한 얼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적어도, 아이단 경이 사망하던 그 순간만은 말이죠. 아이단 경은 새로운 마나 증폭 장치 실험 중이셨고, 그 과정에서 ‘공간 마나 압축 순환 장치’의 과부하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천장에 있던 비상 배출구가 3분 17초 동안 열렸습니다.”
그라함이 숨을 들이켰다. “설마… 그 작은 틈으로?”
“네.” 류신은 단호하게 말했다. “범인은 아이단 경의 실험 패턴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비상 배출구가 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외부에서 정교하게 조준된 마나 얼음 투사체를 발사한 겁니다. 시신에 박힌 얼음 조각은 단순한 단검이 아니라, 강력하게 압축된 마나 얼음 송곳이었을 겁니다. 먼 거리에서도 정확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된 마법 무기였겠죠. 그리고 그 마나 송곳이 아이단 경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습니다.”
류신은 천장의 얼룩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저 희미한 얼룩은 마나 얼음 송곳이 통과하며 남긴 미세한 마나 반응입니다. 비상 배출구가 열렸을 때, 주변의 냉각 마법이 일시적으로 교란되며 생긴 흔적이죠. 이 방에는 침입자의 발자국도, 저항의 흔적도, 심지어 범행 도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범인은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고, 범행 도구는 다시 회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돼…” 리엘이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그 비상 배출구는 손가락 하나 들어갈까 말까 한 작은 틈이었는데…”
“충분했습니다.” 류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완벽한 범행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죠. 고밀도로 압축된 마나 투사체는 아주 작은 틈만 있다면 충분히 발사될 수 있습니다. 범인은 이 공방의 구조와 아이단 경의 실험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자일 겁니다. 외부 마법 방어막을 의식해 직접 침입하는 대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허점을 이용한 것이죠.”
그라함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이 탑 주변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아이단 경의 실험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었단 말인가?”
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단 경의 실험은 종종 강력한 마나 파동을 일으켰을 겁니다. 외부에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을지도 모르죠. 혹은….”
류신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리엘을 지나, 공방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또 다른 인물에게 향했다. 그는 연금술사 협회의 고위 연구원인 ‘카인’이었다. 아이단 경과는 오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카인의 얼굴에는 경악과 함께 미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혹은, 아이단 경의 실험에 대한 내부 정보를 알고 있었던 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류신은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밀실은 완벽하게 깨졌다. 그러나 그 뒤에 숨겨진 그림자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류신의 눈빛은 이미 다음 퍼즐 조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