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화: 사냥꾼의 덧
폐허가 된 도시의 심장이었다. 재앙이 휩쓸고 간 지 수년, 콘크리트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비릿한 쇠 냄새와 눅눅한 곰팡이,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시체 썩는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숨통을 조였다. 지혁은 낡은 방탄 조끼 위로 손수 수선한 가죽 조끼를 걸치고, 녹슨 철골 구조물 사이를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고, 손에 든 개머리판 없는 단축형 소총은 마치 몸의 일부인 양 자연스러웠다.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들의 끄는 소리, 찢어지는 비명 같은 신음은 이제 지혁에게 배경 음악과 같았다. 중요한 건 그 너머의 소리였다. 금속끼리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엔진음, 그리고… 사람의 말소리.
그는 한때 이 도시의 한복판에 있던, 지금은 간판마저 부서져 사라진 백화점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가고, 내부에는 검게 그을린 잔해와 정체 모를 액체 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층마다 쌓인 먼지 위로 누군가 움직인 흔적이 선명했다. 발자국, 엎어진 진열대, 그리고 바닥에 뒹구는 빈 탄피들. 이 모든 것이 그가 쫓는 자들의 흔적이었다.
“승현… 네놈은 어디에 숨어 있는 거냐.”
지혁은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에는 차가운 증오가 스며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낡은 군용 인식표에 닿았다. 녹이 슬어 알아보기 힘든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승현의 부하 중 한 명의 것이었다. 지혁은 그걸 발로 툭 차 벽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굳이 주워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심장에 새겨진 배신의 칼날이 승현의 존재를 끊임없이 상기시켰으니까.
그날의 기억이 불현듯 그의 뇌리를 스쳤다. 함께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며 등 뒤를 맡겼던 유일한 친구.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잔혹한 세상에서, 그래도 서로의 인간성을 지켜주자고 맹세했던 동지. 그러나 그 맹세는 한 줌의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식량과 물이 바닥나고, 감염자 무리가 턱 밑까지 들이닥쳤을 때, 승현은 지혁을 미끼로 던져버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어가는 지혁의 눈앞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를 등지고 무리에게서 도망쳤다.
*‘내가 살아야 너에게 복수할 수 있다.’*
그것이 지혁을 그 지옥에서 살아남게 한 유일한 목표였다. 부서진 몸과 영혼을 끌고 기어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는 변했다. 더 이상 누구도 믿지 않았고,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복수만이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유일한 엔진이었다.
지혁은 3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의 멈춰선 난간을 붙잡고 몸을 날렵하게 움직였다. 멈춰선 에스컬레이터는 이미 계단과 다름없었다. 위층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사냥감이 근처에 있다는 신호였다.
“젠장, 이놈의 전기가 언제 나갈 줄 알고!”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목소리였다. 지혁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 이동했다. 낡은 의류 매장의 마네킹들이 기괴한 자세로 서 있는 공간 너머,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발전기를 돌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곳에서 전기를 쓰는 무리가 있다는 건, 거점이거나 최소한 며칠 이상 머물 생각이라는 뜻이었다.
지혁은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 명의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 캔을 따먹고 있었다. 한 명은 뚱뚱했고, 한 명은 말랐으며, 나머지 한 명은 팔에 험악한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손전등이 그 지도를 비추고 있었다.
“보스는 언제쯤 돌아오는 거야? 지겹다고, 이 지하실만 보고 있려니까.” 뚱뚱한 남자가 투덜거렸다.
“닥쳐. 보스 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리고 함부로 지하실 얘기 꺼내지 마라.” 문신 남자가 경고하듯 말했다.
지하실. 지혁의 눈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승현이 언제나 그랬다. 위험한 비밀을 숨길 때는 늘 지하를 이용했다. 백화점의 지하층은 보급 창고나 주차장이었을 터. 중요한 물건을 숨기거나, 아니면… 승현, 그 놈이 직접 그곳에 있을 수도 있었다.
문신 남자의 눈이 불현듯 지혁이 숨어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순간, 지혁은 본능적으로 몸을 더욱 벽에 밀착시켰다.
“뭐야… 뭔가 있는 것 같았는데.” 문신 남자가 중얼거렸다.
“헛것 본 거겠지, 인마. 여기가 어떤 곳인데. 아니면 좀비 새끼라도 기어온 건가?” 마른 남자가 킬킬거렸다.
“아니… 이 빌어먹을 감각이 틀린 적이 없었는데.” 문신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허리에 찬 칼에 손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다가왔다.
지혁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움을 느꼈다. 그들 중 승현은 없었지만, 이들은 승현의 부하들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문신 남자의 감각은 날카로웠다. 아마도 수많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길러진 것이리라. 하지만 지혁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승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문지기들이었다.
문신 남자가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며 지혁이 숨어있는 그림자를 향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경고음보다 지혁의 움직임이 빨랐다.
쉬익-!
소총 개머리판이 문신 남자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지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 안으로 돌진했다.
“누구… 읍!”
뚱뚱한 남자가 채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지혁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테이블에 내리쳤다. 테이블이 부서지며 캔들이 흩날렸다. 지혁은 쓰러진 남자의 소총을 빼앗아 마른 남자를 향해 겨눴다.
“움직이면 죽는다.” 지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른 남자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두 손을 들었다.
“누, 누구야? 왜 이러는 거야!”
지혁은 총구를 그의 이마에 바짝 들이댔다. “승현이 어디 있는지 말해.”
남자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흔들렸다. “스, 승현 보스? 나, 나는 몰라… 그냥 시키는 대로…”
지혁은 남자의 뺨을 총열로 거칠게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고개가 꺾였다. 피가 입가로 흘러내렸다.
“거짓말하지 마. 이 건물 지하에 뭐가 있지? 승현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말해.”
“지… 지하실엔… 아무것도 없어요… 그, 그냥 비상 식량 창고예요… 보스는 지금 다른 거점으로 갔을 거예요… 진짜예요!” 남자는 울먹이며 빌었다.
지혁은 남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거짓말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 ‘지하실’이라는 단어를 그리도 조심스럽게 언급할 리 없었다. 승현이 감히 자신을 미끼로 삼고 도망쳤던 그날처럼, 이 남자 역시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처럼… 모두가 결국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다.’*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꽉 쥐었다.
“마지막 기회다. 지하실에 뭐가 있지? 승현은?”
“흐읍… 흐읍…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아는 건… 지하실에… ‘푸른 안개’가 가득하다는 것뿐이에요… 보스는 그걸 찾고 있어요… 그, 그리고… 그곳에… 지도를 숨겼다고… 들었어요…”
푸른 안개. 그리고 지도. 지혁의 머릿속에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승현은 항상 재앙 이전의 어떤 유물을 찾는 데 집착했다. 이 폐허가 된 도시 어딘가에 숨겨진, 세상을 다시 재건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고 믿었다. 지혁은 그것이 허황된 망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승현은 달랐다. 그리고 그 지하실에, 승현의 광적인 집착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지혁은 총구를 남자의 눈앞에서 거두고, 그의 턱을 붙잡아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
“지도… 어디에 숨겼다는 거지?”
“그, 그건… 몰라요… 보스만 알아요… 흐읍… 제발… 더 이상 아는 게 없어요…”
지혁은 남자의 눈을 다시 한번 똑바로 쳐다봤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닌, 진실한 공포가 그 속에 서려 있었다. 남자는 정말 더 아는 것이 없는 듯했다.
지혁은 남자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그의 뒷목을 강하게 내리쳤다. 남자는 으읍, 하는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다. 지혁은 쓰러진 그들을 뒤로하고, 망설임 없이 백화점 지하로 향하는 낡은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비릿한 흙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지혁의 심장은 맹렬하게 고동쳤다. 사냥감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아래, 어둠과 푸른 안개, 그리고 지도가 숨겨져 있는 곳에… 승현, 네놈이 있을 테니까.
계단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철문이 앞을 막고 있었다. 문틈으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음산한 푸른빛이었다. 지혁은 문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쇠의 감촉 너머로, 그는 자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사냥의 끝이 보였다. 복수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울리고,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전율과 함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지혁은 숨을 멈췄다.
그곳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