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황무지였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모래와 기괴한 형상의 바위산만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태초부터 영겁의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에, 두 개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흐음, 련. 대체 자네는 무엇을 감지하고 이 불모의 땅까지 나를 끌고 온 겐가? 영기라곤 먼지 한 톨도 없는 이런 곳에서.”
선인의 경지에 이른 자라면 으레 품격 있는 선의(仙衣)를 입기 마련이었으나, 묵은 낡고 투박한 가죽옷 차림이었다. 등에는 족히 수백 년은 묵었을 법한 고서들이 가득한 배낭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쉰 목소리에는 불평이 가득했지만, 낡은 안경 너머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련은 묵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붉은 바위 사이를 살폈다. 그의 검은 도포는 먼지투성이였지만, 그을린 피부와 단단한 어깨는 굳건한 의지를 드러냈다. 련은 숨을 들이쉬고 영력을 집중했다. 미약하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묵 선인. 제 감각이 틀리지 않습니다. 이곳에는 무언가… 잠들어 있습니다. 대지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아련한 파동, 마치 수만 년 전의 고동 소리 같습니다.”
묵은 혀를 쯧쯧 찼다. “그놈의 기묘한 감각이란.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영기의 흐름에 민감한 체질이라더니, 이제는 돌멩이의 심장 박동까지 듣는 겐가?”
하지만 련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임 없이 걷더니, 유난히 거대한 바위산 앞에 멈춰 섰다. 바위산은 마치 거인의 손가락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련이 바위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바위는 거칠었지만, 그의 손끝에 닿는 곳에서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 바위산은… 살아있는 진법입니다. 그것도 상고 시대의.”
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고 시대의 진법이라니. 그건 거의 전설 속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고 바위산을 면밀히 살폈다. 육안으로는 그저 평범한 바위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가 오랜 세월 갈고닦은 영안(靈眼)을 열자, 희미한 빛의 잔흔들이 바위의 결을 따라 흐르는 것이 보였다.
“흠… 과연. 평범한 바위가 아니었군. 영기를 흡수하여 자신을 숨기는 진법이라니, 지독하리만치 교묘하군.” 묵은 감탄인지 불만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곳에 감춰져 있었다면, 안에는 필시 엄청난 것이 있을 터. 좋아, 자네의 어설픈 감각을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
련은 빙긋 웃었다. 묵 선인의 투박한 말투 속에 숨겨진 기대감을 모를 리 없었다. 련은 손바닥을 펼쳐 바위산의 한 지점에 대고 영력을 주입했다. 진법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균형을 맞추며 잠들어있던 봉인을 깨웠다.
바위산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붉은 모래들이 바닥에서 솟구쳤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산의 한 부분이 마치 거대한 문처럼 안쪽으로 천천히 밀려 들어갔다. 둔중한 마찰음과 함께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자, 그럼 들어가 볼까. 묵 선인.” 련이 발걸음을 내딛으려 하자, 묵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 상고 시대의 진법은 단순하지 않다. 안쪽의 영기 흐름이 심상치 않으니, 내가 먼저 가겠다. 자네는 뒤따라오게.”
묵은 허리춤에서 영석을 꺼내 영력을 주입했다. 영석은 작은 불꽃처럼 타오르며 주변을 밝혔다. 어둠이 걷히자,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듯한 매끄러운 바위 벽,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읽을 수 없는 고대의 문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면에서는 은은한 영기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상고 시대의 영기가… 이렇게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니.” 묵의 얼굴에 놀라움이 역력했다.
련과 묵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통로는 길고 완만하게 이어졌다. 영석의 불빛이 닿는 곳마다 벽면의 문양들이 섬뜩하게 빛을 발했다. 그들은 한참을 걸어 내려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길의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앞을 막고 있었다. 문에는 거미줄처럼 복잡한 영기 진법이 얽혀 있었다.
“이건… 천궁의 옥문도 이것보다는 단순할 게다.” 묵은 진법을 찬찬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 규모의 봉인이라면, 최소한 대라금선(大羅金仙) 이상의 경지에 오른 자들이 합심해야 겨우 열 수 있을 텐데.”
련은 철문 앞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진법에 닿자, 푸른 영광이 번뜩이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젠장, 함부로 건드리지 말게!” 묵이 소리쳤다. “이건 생체 영력을 감지하고 작동하는 진법이야. 침입자를 즉시 소멸시키는 고대 시대의 살상 진법이라고!”
하지만 련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영기를 진법의 흐름에 맞춰 조율하기 시작했다. 푸른 영광의 반발은 점차 잦아들었다. 련의 몸에서 발산되는 영기가 진법의 일부처럼 스며들었다.
“이 진법은… 공격적인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조건에 맞는 영력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련의 말에 묵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과연, 련의 특별한 감각은 영기 조율 능력에서도 발휘되는 것인가.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진법의 푸른 빛이 점차 붉은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온순한 황금빛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안쪽으로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는 거대한 공간이 펼쳐졌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거대한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고, 중앙에는 정체불명의 장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공간 전체에 희미한 영기가 감돌았지만, 그 영기는 일반적인 영기와는 확연히 다른, 태고의 향취를 풍겼다.
“이곳은… 어떤 선인의 동굴도, 어떤 비전의 수련장도 아니야.” 묵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경외감과 함께 깊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마치… 거대한 도시의 심장부 같군.”
련은 홀린 듯 중앙 장치로 다가갔다. 장치는 거대한 연꽃 모양이었다. 수십 개의 꽃잎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그 안쪽에서는 은은한 푸른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꽃잎 표면에는 고대의 상형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멸절의 시대’를 준비했던 장소입니다.” 련이 문자를 해독하듯 나지막이 말했다. “상고 시대의 선인들은 언젠가 영기가 고갈되고 모든 생명이 소멸할 대재앙이 올 것을 예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대비해… 모든 것을 재건할 ‘씨앗’을 이곳에 보관한 겁니다.”
묵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멸절의 시대는 전설 속에서만 언급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멸의 시대였다. 그 전설이 사실이었다니.
“씨앗이라니?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겐가?”
련은 꽃잎에 손을 얹었다. 그의 영력이 다시 한번 장치와 공명했다. 그러자 연꽃 장치가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고, 꽃잎들이 하나둘씩 벌어졌다.
꽃잎 안쪽에는 거대한 수정 구슬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정 구슬 안에는 작은 은하수가 갇힌 듯, 무수히 많은 영기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생명의 기운이, 태초의 원력이 느껴졌다.
“이것은… ‘태초의 영핵’입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 모든 영기의 시작점이 될 수 있는 씨앗.” 련의 목소리가 떨렸다. “상고의 선인들은 이 씨앗을 통해 멸망한 세상을 다시 영기로 채우고, 생명을 잉태하려 했습니다. 허나… 씨앗을 깨우는 방법에 대한 기록은… 너무나 파편적입니다.”
묵은 수정 구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영안은 구슬 속에서 끝없이 순환하는 영기의 흐름을 읽어냈다. 그것은 단순히 영기의 집합체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스스로 진화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세계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혹은 파멸이 될 수도 있겠군.” 묵의 목소리가 숙연해졌다. “과연, 그들이 이 씨앗을 깨우기 위해 어떤 조건을 남겼을까.”
련은 구슬을 응시했다. 그의 감각은 구슬 속에서 미약한 ‘부름’을 듣는 듯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간절한 요청이었다.
“이것은 무력을 통한 개방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통한… 공명입니다.” 련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영력을, 자신의 존재 자체를 수정 구슬에 투영했다. 어떠한 사심도 없이, 그저 구슬이 품고 있는 태고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련의 몸은 영력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수정 구슬의 은하수도 더욱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두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는 듯했다.
묵은 그저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련의 기묘한 감각이, 어쩌면 이 태초의 영핵이 수만 년을 기다려온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수정 구슬에서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연꽃 장치를 감싸고, 거대한 공간을 채우더니, 철문을 넘어 닫힌 통로를 따라 외부로 뻗어나갔다.
황무지의 상공에 푸른 영광이 찬란하게 빛났다. 붉은 모래는 푸른 빛을 받아 생기를 띠는 듯했다. 메말랐던 영기 흐름이 다시 깨어나, 대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련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깊고 맑아져 있었다. 수정 구슬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안의 영기는 이제 외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영핵이 깨어난 것이다.
“성공했군, 련.” 묵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낡은 안경 너머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초의 영핵은 이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곳은 더 이상 잊혀진 유적이 아닙니다. 이 세계의 새로운 심장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유적을 뒤로하고 다시 황무지로 나섰다. 유적의 문은 다시 닫혔지만,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채 존재하지 않았다. 대지 위로 솟아오른 푸른 영광은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도 감지될 터였다. 멸절의 시대를 준비했던 고대 선인들의 지혜가, 수만 년의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을 밝혀낸 련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 인물이 될 터였다. 그들의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