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챕터: 커피 향 뒤에 숨은 칼날
지은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갓 로스팅한 원두의 고소하고 쌉쌀한 향, 갓 구운 스콘의 달콤한 버터 향, 그리고 오래된 책갈피에서 나는 아련한 종이 향이 뒤섞여 그녀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아침 7시 30분. 햇살은 아직 비스듬하게 가게 안으로 스며들어 벽에 걸린 낡은 포스터 위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책갈피와 커피잔’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지은의 작은 우주였다. 닳은 나무 탁자, 알록달록한 머그컵, 그리고 빼곡히 꽂힌 책들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누구에게는 그저 동네의 작은 카페 겸 서점일 뿐이었지만, 지은에게는 삶의 전부였다.
“후으읍… 좋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그녀는 작업복 앞치마를 고쳐 맸다. 곧 있으면 첫 손님이 올 시간이었다. 늘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회사원, 아침 일찍 산책을 마치고 들르는 노부부, 학교 가기 전 잠시 들러 책 한 권을 읽는 학생까지. 지은은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모두 그녀의 소중한 일상 조각들이었다.
“지은아! 나 왔어!”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리며 차가운 아침 공기와 함께 하윤이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늘 그랬듯 해맑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지은과 하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붙어 다니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서로의 비밀을 꿰뚫고 있었고, 서로의 꿈을 가장 먼저 응원해 주는 사이. 지은이 이 작은 가게를 열겠다고 했을 때, 주위의 모든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밤을 새워가며 인테리어를 돕고, 메뉴를 개발했던 이가 바로 하윤이었다.
“일찍 왔네, 하윤아. 어제 밤새 게임했어?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다?”
지은이 장난스레 핀잔을 주자, 하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바리스타 앞치마를 둘렀다.
“에이, 그래도 우리 지은이 돕는 건 못 참지! 오늘은 내가 오픈 파트너 해줄게. 오다가 신작 원두도 몇 개 찾아왔어. 좀 이따 맛보자.”
하윤은 항상 그랬다. 지은의 가게 일이라면 제 일처럼 발 벗고 나섰고, 지은이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지은은 꽤 오랫동안 적자를 면치 못하던 가게를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하윤이 가게의 절반을 맡아 운영해 주다시피 한 덕분이었다. 지은은 하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고마워, 하윤아. 너 없었으면 난 진작에 포기했을 거야.”
“무슨 소리! 너니까 여기까지 온 거지. 나야 뭐, 그냥 옆에서 거들어주는 거지.”
하윤은 늘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은은 알았다. 하윤이 없었다면 ‘책갈피와 커피잔’은 진작 문을 닫았을 것이다. 지은은 하윤에게 따뜻한 라떼를 건넸다. 하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를 받아 들고는 창가 자리에 앉아 익숙하게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손님들의 웃음소리, 커피 머신의 규칙적인 소음,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지은은 오후에 잠시 은행에 다녀올 일이 생겨 하윤에게 가게를 맡겼다. 요즘 가게 매출이 조금씩 오르고 있어서, 그동안 미뤄두었던 대출 상환 스케줄을 조정하고 싶었다.
은행 창구 직원은 지은에게 친절하게 웃어주며 서류를 건넸다.
“손님, 이 서류에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현재 남은 대출금액은… 으음, 잠시만요.”
직원이 스크린을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네요. 대출금액이… 지금 0원으로 표시됩니다. 혹시 손님께서 최근에 전액 상환하신 기록이 있으신가요?”
지은은 눈을 깜빡였다. “네? 아니요. 저는… 전혀요.”
직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계좌 기록을 확인해 보니, 두 달 전 전액 상환된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사업자 명의도 최근에 변경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지은의 심장이 발끝으로 곤두박질쳤다. “네? 사업자 명의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 서류상으로는 ‘책갈피와 커피잔’의 사업자 명의가 두 달 전 ‘박하윤’ 님으로 변경되었고, 박하윤 님께서 모든 대출금을 상환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손님께서는… 지금 이 가게의 법적인 소유주가 아니십니다.”
천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은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하윤? 하윤이라고?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윤이? 믿을 수 없었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 몸을 움직여 가게로 돌아왔을 때, 하윤은 여전히 카운터에 서서 손님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해맑은 미소가, 지은의 눈에는 거대한 비수처럼 박혔다.
지은은 손님들이 모두 나간 후, 떨리는 목소리로 하윤을 불렀다.
“하윤아.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하윤은 고개를 갸웃하며 지은을 돌아봤다. “응?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지은은 탁자 위에 은행에서 받아 온 서류를 내밀었다. ‘사업자 명의 변경’이라는 글자가 붉은색 글씨처럼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윤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게… 뭐야?”
“설명해 줘. 이게 대체 무슨 뜻인지.” 지은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하윤은 서류를 힐끗 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듯 나지막이 말했다.
“지은아… 미안해.”
그 한마디가 지은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미안하다니. 그녀의 전부를 빼앗아 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가게… 원래 내 거였잖아. 내가 처음부터 구상하고, 네가 돕겠다고 했던 거잖아. 너 없었으면 안 됐을 거라고 늘 그랬잖아… 그런데… 어떻게….”
하윤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너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 못 할 가게였어. 매달 적자만 내고… 내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망했을 거라고. 그리고… 네가 힘들 때 내가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이 정도는… 내가 받아도 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지은의 심장이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세상이 산산조각 났다. 믿었던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잔인한 비수였다. 그녀가 바쳐온 모든 노력과 꿈이, 고작 ‘감당 못 할 가게’와 ‘이 정도’라는 단어 속에 짓밟혔다.
지은의 눈에는 차가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슬픔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뼛속까지 시린 배신감과 지독한 분노였다. 그녀는 하윤을 똑바로 쳐다봤다. 생전 처음 보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네가… 어떻게… 감히.”
지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 이상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부를 빼앗아 간 이 배신에 대해, 하윤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아주 잔혹하게.
따뜻했던 커피 향 가득한 공간은 더 이상 지은의 아늑한 우주가 아니었다. 이제 그곳은 그녀의 심장을 찢어 발긴 배신의 현장이자, 차가운 복수의 서막이 오르는 무대였다.
하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지은은 그런 하윤을 뒤로 하고 가게 문을 열었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웠지만, 지은의 세상은 이미 완전히 뒤집혔다.
“박하윤. 넌 내가 이대로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겠지?”
지은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차가워서, 하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니야. 이건… 시작일 뿐이야. 네가 나에게서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나는 반드시 되찾을 거야. 네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고 지은은 그렇게 완전히 파괴된 자신의 세상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슬픔으로 흐려지지 않았다. 오직 복수만이 그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