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렌은 낡은 외투 깃을 바싹 끌어올렸지만, 가시 돋친 냉기는 기어코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의 몸을 훑었다. 폐허가 된 옛 도시 에텔가르드의 잔해는 언제나 그러했듯, 죽음의 냄새와 썩어가는 흙먼지로 가득했다.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미약한 존재감을 주장할 뿐, 다가올 위험 앞에서 한없이 초라했다.
“젠장,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없어.”
렌은 헐거운 석탑의 그림자를 따라 걷다 중얼거렸다. 보름 가까이 제대로 된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녹슨 철 조각이나 깨진 도자기 파편이라도 있어야 길드의 잔돈푼이라도 받을 수 있을 텐데, 에텔가르드는 이제 마른 뼈대만 남은 시체와 같았다. 그나마 숨어 지내던 쥐새끼들마저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발아래 돌멩이가 미끄러지며 그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비틀거리며 휘청이던 렌은 썩어가는 나무 뿌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안에서 바스러질 뿐이었다. 아차,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그의 몸은 아래로,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콰아앙!
등 뒤로 둔탁한 충격이 전해졌다. 폐허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진 듯했다. 고통에 신음하며 렌은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온몸이 쑤시고 저렸다. 겨우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금까지 에텔가르드에서 본 어떤 것과도 달랐다.
그곳은 지하 깊은 곳에 숨겨진 거대한 공동(空洞)이었다. 천장에서는 검붉은 이끼가 뒤덮인 종유석들이 위협적으로 매달려 있었고, 바닥은 희미한 보랏빛으로 빛나는 알 수 없는 물질로 뒤덮여 있었다. 공기는 마치 수천 년 동안 갇혀 있었던 듯, 묵직하고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크랙 사이로 솟아오른 흑요석 기둥이 서 있었다. 기둥 전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불규칙하게 깜빡거리는 어둠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긴… 뭐지?”
렌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서 스르륵 기어 나오는 그림자들을 발견했다.
그림자들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짐승의 형상을 한 것도 있었고, 인간의 잔해를 어설프게 꿰어 맞춰놓은 듯한 것도 있었다. 눈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은 살기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에텔가르드의 지하 깊숙한 곳을 배회하는, 살점만을 탐하는 불완전한 괴물들이었다.
그것들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렌을 둘러쌌다. 렌은 재빨리 몽둥이를 움켜쥐었지만, 떨리는 손으로는 겨우 지지대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등 뒤로 거대한 흑요석 기둥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괴물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동굴 전체를 울렸다.
“저리 가! 오지 마!”
렌은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공포에 질린 목소리는 곧 메아리 속으로 사라졌다. 가장 가까이 다가온 괴물이 긴 팔을 뻗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손이 등 뒤의 흑요석 기둥에 닿았다.
마치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심장이 깨어나는 듯한 진동이 그의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 그러나 동시에 폭발적인 에너지가 그의 존재를 꿰뚫는 듯한 황홀경이 찾아왔다. 렌의 눈앞이 번쩍 섬광으로 가득 찼다.
“크아아악!”
그의 비명은 더 이상 공포에 질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터져 나오는 원초적인 포효에 가까웠다. 렌의 손이 닿은 흑요석 기둥의 고대 문자들은 미친 듯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검은색이었다. 심장을 꿰뚫는 듯한 맹렬한 어둠의 빛.
기둥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문자들이 그의 팔을 타고 올라와 그의 피부 위로 꿈틀거렸다. 마치 문신처럼, 혹은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그의 몸을 휘감았다. 렌의 심장이 고통스럽게, 그러나 강력하게 울렸다. 그의 혈관 속을 흐르는 피가 검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렌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희망 없이 흔들리던 갈색이 아니었다. 밤하늘의 심연처럼, 모든 빛을 집어삼킬 듯한 깊은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 속에는, 흑요석 기둥의 고대 문자들과 똑같은 검은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를 포위하고 있던 괴물들이 움찔했다. 본능적인 공포가 그들의 굶주림을 압도하는 듯했다. 한 괴물이 뒷걸음질 치며 그르렁거렸다.
“죽어…”
렌의 입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그의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그 안에 수천 년 동안 갇혀 있던 또 다른 존재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 듯했다.
그의 팔에 새겨진 고대 문자들이 맹렬하게 빛나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검은 그림자들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렌의 주위를 맴돌며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했다. 그림자들은 날카로운 손톱처럼 변했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괴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콰앙! 콰드득!
렌에게 달려들던 괴물들은 저항할 틈도 없이 그림자들에 꿰뚫렸다. 그림자들은 괴물들의 살점을 산산조각 내고, 뼈를 부숴버렸다. 살아있는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 괴물들의 몸은 순식간에 시들고 재가 되어 스러졌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불과 몇 초 만에, 그를 에워쌌던 괴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변은 고요해졌다. 검은 그림자들은 다시 렌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의 피부에 새겨졌던 고대 문신들도 자취를 감췄다.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렌은 떨고 있었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짜릿했고,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의 눈동자는 원래의 갈색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시야에는 방금 전 자신이 저지른 파괴의 잔해가 선명했다. 희미한 보랏빛 빛을 내던 바닥에는 괴물들의 흔적만이 검게 그을린 채 남아 있었다.
렌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깨끗한 손. 그러나 이 손으로, 방금 전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힘을 휘둘렀다. 끔찍하고, 아름답고, 동시에 너무나도 섬뜩한 힘이었다.
“이게… 대체…”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어둠이 움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 그의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려는 듯했다.
렌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힘이 그의 안에 깊숙이 뿌리내린 채, 다음 폭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구원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렌은 폐허의 어둠 속에서, 이제 막 깨어난 심연의 메아리를 홀로 감당해야 했다.
